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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교 전 아산시 부시장(전 충남도 정책기획관) |
나는 도청 지방과(기획예산계)에서 7급으로 만 7년간 근무한 후 1986년 4월 6급으로 승진하여 예산군 오가면에 위치한 충남도 사업소인 ‘농산물원종장’ 서무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6급 승진은 1969년 공직에 입문한 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인사발표가 있던 날 원종장 서무계 직원이 "계장님~"하고 전화가 왔는데 처음 듣는 계장 호칭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7급에서 6급으로 승진하는데 얼마가 소요되는지 알 수 없지만, 1980년대 당시는 ‘늦은 승진’이 전국적 현상이었다. 5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로 베이스 예산 편성’, ‘공무원 정원동결’ 정책 등을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통을 분담하자는데에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로 몸으로 떼우고 손으로 쓰는 일이 크게 줄었음에도 공무원 숫자가 놀랄만치 급격히 증가된 것을 보고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입장이다.
기존의 농작물 품종을 개량하여 신품종을 탄생시키는데 이때 신품종이 원원종(原原種)이고, 이 원원종을 재배하여 생산한 종자가 원종(原種)이다.
농산물 원종장은 「원원종」을 재배하여 원종을 생산하고 원종을 대량 재배하여 선별한 개체의 종자를 농가에 보급(보급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볍씨,보리 , 밀 ,콩 ,땅콩 등 종류가 수십가지인데다 볍씨만 해도 추청벼 ,아끼바레 ,낙동벼 ,금강벼 등 다시 십수 종으로 재분류 된다. 이를 원종장이 보유한 논 4백 마지기(8만평, 28ha), 밭 6백 마지기(12만평, 40ha), 도합 천마지기 논밭에 원종을 재배하여 보급종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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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도 농산물 원종장. 현재는 충남도 스마트농업본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
1980년대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대우자동차를 경영할 때 TV대담 프로에 출연하여 "승용차는 6개월마다 새로운 모델의 차종을 새로 내놓아야 자동차공장이 계속 돌아갈 수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는 2000년도에 천안시 성환에 있는 「국립종축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가축품종 개량을 담당하는 한 연구사는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가축품종 개량을 꾸준히 시행하지 않으면 모두 퇴화되어 방치된 그 개체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고 결국 사라지게 된다"면서 "우리나라 축산농가가 어떤 과정으로 가축을 기르고 있는지,국민들이 고기를 마음 놓고 사 먹고 있게 되는지,축산인들의 각고의 노력과 애환을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예산을 만지는 공무원들은 묵묵히 일하고 있는 우리 연구직 공무원들을 스쳐 지나가듯 가볍게 보고 있는데 본질을 잘 파악해야 된다"고 하여 내가 숙연해진 적이 있었다.
농산물 원종장 근무할 때가 생각이 났고 그 때 원종장 큰 마당에 드넓은 비닐을 깔고, 원종 콩을 널어 놓은 후 불순한 종자가 섞여 있는지, 쪼그리고 앉아 골라내는 작업을 하던 연구사와 인부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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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내다보이는 들판이 농산물원종장 논(포장)이다. |
원종장의 기구는 연구직으로 「원종장장」과 부장장 격인 「기술담당관」, 「전작계」와 「답작계」, 그리고 행정지원팀으로 「서무계」가 있었고 ,트랙터 운전기사 등 고용직을 포함하여 25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외에 논과 밭에서 일하는 일용인부가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매일 최소 30명에서 50명, 때로는 100여 명씩 원종장으로 출근하여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임 후 원종장 포장(圃場)을 둘러보고 일꾼들 일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때는 4월로, 논은 원종장 사무실이 위치한 예산군 오가면 역탑리에 위치하였고 밭은 원종장 사무실에서 4km쯤 떨어진 「신례원」에 소재하고 있었다. 농산물 원종장 혁신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첫번째> 논을 둘러 보던 중 인부들이 오전 참에 국수를 먹고 있었는데 식사 장소가 논에 거름을 주기 위해 썩힌 거름을 모아둔 논 가운데 퇴비장이었다. 퇴비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이 같은 퇴비 더미 옆에서 모두가 쪼그리고 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는데 조리기구라 해야 오랫적 쇳물로 만든 가마솥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연탄도, 장작도, 가스통도 없었다.
"무엇으로 국수물을 끓였느냐?"고 물으니 "원종장 사무실 옆 솔밭 왕 소나무에 올라가 죽은 나뭇가지(내 고향 부여에서는 이를 두고 「삭쟁이」라 불렀다)를 꺾어서 불을 땠다"는 것이다. 국수 반찬인 김치도 보이지 않고 막걸리를 마시는데 안주도 없었다.
6.25 피난 시절도 아니고, 행정관청에서 정식 예산으로 인부를 사역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인데 국수 몇 덩이 던져주고, 막걸리 몇 통 배달케 해주면서 나머지는 인부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사정을 알아보니 "예산이 없어요", "예산요구는 해봤느냐?"고 되물었으나 "신청해도 해주나요" 답변하면서 "그렇게 해도 자기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한두 해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 오고 있어요"가 답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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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지 정리지구에 농막을 설치하여 농민들을 쉬게 해주었다. |
나는 곧바로 사진기를 빌려오게 하여 솥단지 하나에 의지하여 죽은 나무가지로 국수 삶는 모습, 삶은 국수를 퇴비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먹는 장면, 소나무에 올라가 죽은 나뭇가지를 꺾는 장면을 모두 사진에 담고 구구절절이 실상을 담은 건의서에 사진을 첨부하여 도청으로 가서 이초영 예산계장께 보고하였다.
건의서를 펴 보이며 말씀드리기를 "원종장 논밭 1000 마지기 땅임자는 충남도지사다. 관리운영 최종 책임도 도지사에게 있다. 행정관청에서 이게 뭐냐. 누가 알게 될까봐 겁난다. 기자가 알게 돼서 보도하면 대한민국 톱 뉴스거리가 될 것이고 도지사가 큰 망신을 당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지금이라도 개선할 기회를 알려드리는 것을 다행으로 아시고 화급히 조치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이초영 계장께서 내 말을 듣고 보고서를 훑어보시더니 한동안 말이 없으시다가 "알겠다"고만 답변하셨는데 이튿날 즉각 예산조치가 이루어져 후속조치도 지체없이 이행하였다.
① 우선 인부들과 함께 나도 직접 팔을 걷어 붙이고 퇴비장 청소작업부터 하였다. 오후 논일을 마치고 청소작업을 하다 보니 밤까지 이어졌다. 퇴비더미를 싹 치우고 콘크리트 바닥을 군대생활 때 해봤던 「미스나우시」 방식으로 깨끗하게 닦았다.
② 목수들에게 "목수 소질이 있는 분 계신지?" 여쭤보니 3~4명이 손을 들었다. 함께 목재소로 가서 식탁을 제작할 목재를 골라 구입하고 직접 식탁을 만들었는데 이틀 만에 간이 식탁 8인용 8개를 제작하여 편안히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③ 국수를 삶을 기구와 연료도 즉각 조치하였다. 가스통과 가스용 가마솥을 구입하여 라이터만 켜면 조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④ 국수 육수를 만들 때 사용하는 「멸치」도 구입하였고 김치도 음식솜씨가 있는 여자 인부를 자기들끼리 뽑으라고 하여 인부 2명을 논밭에 나가 일하는 대신 김치를 만들게 하였고 배추와 양념은 시장에서 구입케 하면서 예산으로 지출하였다. 막걸리 안주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나도 함께 인부들과 식사도 하고 막걸리도 함께 마셨다. 여름철 해가 길어지면서 동태찌개를 가마솥 한솥에 가득 끓여 막걸리 안주 겸 푸짐하게 대접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게 살 때 「거지」가 오면 문간에 먹을 것 던져 주듯 하다가 집안으로 모셔 제대로 된 상차림으로 일꾼을 대접하는 것처럼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나이 36세 때다. 모두가 누님이고, 형님이고, 이모고, 고모이고, 어머니이고, 아버지 같은 분이었고 충남도민들이었다.
1978년 손수익 지사님께서 시군예산을 심의하면서 "「경지 정리 지구」에 농막(農幕)을 설치하라"는 지시가 있으셔서 지금도 충남도내를 지나다 보면 군데군데 콘크리트 정자형 농막을 목격할 수가 있다.
논밭에서 뙤약볕 아래 땀 흘려 일하고 난 후 점심이나 새참을 논두렁에서 쪼그리고 앉아 먹고 있는 농민들을 보고 농민 사랑을 실천한 것이었다.
김용교 전 아산시 부시장(전 충남도 정책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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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