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나이 들며 행복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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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나이 들며 행복해지기

양성광 전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

  • 승인 2026-05-18 16:33
  • 신문게재 2026-05-19 18면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양성광 원장
양성광 전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
며칠 전,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40년 간의 직장 생활을 모두 마쳤다. 주변에서는 시원섭섭하지 않냐고 묻는 이도 있는데, 지난 세월 매 순간을 나름대로 의미 있게 흘려보냈다고 생각하니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최면술사의 '레드썬' 주문에 따라 잠시 최면에 빠졌던 것처럼 40년이 후딱 지났다.

고맙게도 직장 생활의 마지막 10년은 고향인 대전에서 보낼 수 있었는데, 이번에 퇴직하면서 대전을 떠나 아내의 고향 근처인 경기도 소도시로 이사를 왔다. 이사는 짐을 싸고 장소를 옮긴다는 면에서 여행과 비슷하다. 그러나, 여행은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행복하지만, 이사는 준비할 때부터 스트레스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어서 하는 이사는 나잇살처럼 불어난 짐에 치이고,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 때문에 골병들기 십상이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할까 싶어서 큰맘 먹고 버리고 또 버려도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물건들이 구석구석에서 자꾸만 기어 나온다. 요즘 젊은이들은 책은커녕 동영상도 긴 것은 마다하고 쇼트폼만 본다는데, 한쪽 벽면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은 또 어이할꼬. 차제에 반 이상을 버리리라 작심하고 달려들었는데, 이리저리 살펴만 보다 이틀을 꼬박 보냈다 - 손때가 묻은 책들은 추억 때문에 안되고, 안 읽은 책들은 이제 시간이 많으니 혹시 읽을까 하면서.

이번에 보니 예전과는 달리 행동이 굼떠졌고, 순발력도 떨어진 게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보다. 아내는 그래도 나보다 몇 살 젊다고, 쓰지 않는 애물단지 물건들을 당근에 내다 팔아 쌈짓돈을 챙기고 공간도 늘려나간다. 나도 힘을 보태 꾸역꾸역 하나씩 해결하다 보니 어느새 이사를 마쳤다. 짐들도 눈에 거슬리지 않게 구석구석에 숨어들었다. 아내는 이 집을 '우리의 마지막 집'이라 생각하고 골랐다고 했다. 대전에서는 10년 동안에 5번이나 이사했다. 그간 옮겨 다닌 집들은 모두 살기에는 편했지만, 어느 것 하나 Home Sweet Home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집은 마지막 집이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처음부터 정이 간다.

나이가 들면서 가구나 집기는 더 이상 새로 사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막상 이사를 하고 나니 이것저것 소소하게 필요한 것이 자꾸만 생긴다. 아내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다 보니 신혼 때 소꿉장난하듯 살림살이를 사들이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바쁘고 가난했던 유학생 생활이었지만, 좁은 수납공간을 넓히려 낑낑대던 내게 뚝딱 열무국수를 말아주던 아내가 한없이 예뻐 보이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행복이란 게 뭐 별건가. 마음먹기 나름이지 않을까. 어쩌면 학업과 돈에 대한 압박이 덜한 지금이 그때보다 더 행복해지기 쉽지 않을까. 은퇴 후 시간이 여유로워져서 참 좋다. 모처럼의 휴일에 지친 몸으로 쫓기듯 집안일을 해치우지 않아도 되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된다. 여행 갈 때나 문화생활을 할 때도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을 선택해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도 육아와 회사 일로 정신없이 바빴던 그 시절을 행복했다고 추억하는 이가 많은 것은 그래도 그때는 앞으로 그려나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젊은 나이에 경제적 독립을 이뤄 조기에 은퇴한 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파이어(FIRE)족도 있다는데. 나이가 들어 은퇴해서도 마찬가지로 꿈과 희망을 품고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지난 주말엔 충남대학교 정심화 홀에서 열린 '쎄씨봉, The Last Concert'에 다녀왔다. 데뷔 58주년을 맞은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등 4명 멤버의 평균 나이는 80이 넘었단다. 나이 때문인지 목소리가 갈라지거나 허리가 구부정한 멤버도 있었지만, 그들의 달콤한 화음과 멜로디는 우리를 4~50년 전의 젊은 날로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저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에게도 무언가 의미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텐데. 서두를 필요도 없지만, 너무 늦기 전에 그 일을 찾아 나서야겠다./양성광 전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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