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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진 한남대 교수/문학평론가 |
역겨운 예술, 추의 미로서 이런 종류의 혐오스러운 엽기와 배설과 부패의 향연은 다양한 장르에서 흔하게 재현되기 일쑤다. 영화로는 '양들의 침묵',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복수는 나의 것', '감각의 제국' 등을 추천할 만하다. 사지 절단, 내장의 노출, 진한 선지피가 화면 가득한 하드고어적 잔인함의 스플래터나 슬래셔는 이미 익숙한 것이다. 범죄와 파괴적 본능, 여기서 쾌락원칙은 현실원칙을, 타나토스는 에로스를, 추는 미를 압도적으로 초과한다.
인간의 몸은 엽기적이고 혐오스런 상상력이 만개하는 거점이다. 몸의 절단, 살의 관통, 기형, 동식물과의 혼종 같은 변형과 변성, 그리고 본능적 욕망, 분비물, 배설, 부패와 같은 혐오나 공포의 대상은 그로테스크 미학의 핵심 의미소다. 특히 엽기라는 용어가 생물체나 신체의 극단적 훼손이나 변성작용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사냥이 환기하는 잔인한 유기체적 사건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육체에 관한 이런 상상력은 특이한 인식론적 마디를 형성한다.
이제 문학에 연관해 일제강점기 춘원이 '무정'에서 그린 육체는 싱싱하고 아름다우며 풍만하고 탐스럽다. 이로부터 근대문학에는 소유욕을 부추기는 육체, 지극히 감각적인 육체, 남성에 의해 대상화되는 여성 육체가 생생하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선형과 영채의 몸을 응시하는 형식의 시선에는 당시 부르주아지들의 이념적 지향이 투사되어 있다. 즉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는 능동적 주체, 근대성의 성취, 문명의 달성 등 그들이 추구한 가치의 압축적 표지다. 형식의 관음증에 가까운 에로스적인 시선은 생동하는 삶과 밝은 문명에의 지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육체는 이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고, 인간의 본능은 살아 있음의 상태만을 지향하는가? 춘원의 싱그럽고 환한 육체가 불러오는 환상에 곧바로 부정적 응대를 한 이가 김동인이다. 윤리, 이념, 이성 이전의 인간, 육체적 본능만으로 팽배한 인간을 등장시켜 배설하고 오염되고 짓무른 육체의 더러움을 그린 '태형', 예술가의 공격본능은 범죄가 될 수 없다는 논리의 '광염 소나타'나 '광화사'에는 신체훼손, 살인, 시간을 비롯한 시체 훼손 모티프까지 등장한다.
동인과 비슷한 시점에 또 소멸해가는 육체를 그린 이는 최명익이다. 그의 '무성격자'를 비롯한 여러 소설에서 육체는 비관적인 죽음의 상상력과 연관되어 동인과는 다른 맥락에서 출현한다. 그의 죽음엔 전망 없는 세계, 미래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실존의식이 무겁게 각인되어 있다. 삶과 세계에 대한 전망상실, 죽음에 사로잡힌 육체에서 우리는 암울하고 잔혹했던 일제 말 지식인의 절망적 표정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명익의 소설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부패와 훼손된 육체는 시대적 메타포를 함유한다. 요컨대 썩고 문드러져 무기물로 변성 중이며 동물 사체에 비유되는 육체는 근대와 문명에 대한 강력한 부정과 회의를 은유한다. 근대 초극이라는 제국의 정치적 서사, 즉 근대를 초극한 동양이라는 대일본제국의 식민지배 논리와 거대한 허구적 모델이 모두를 매혹한 건 아니다. 그는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몇몇 지식인들의 황폐한 내면을 썩어가는 육체로 환유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육체의 몸부림은 많은 걸 말한다.
김홍진 한남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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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