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스터 션샤인과 송자대전판

  • 오피니언
  • 사외칼럼

[기고] 미스터 션샤인과 송자대전판

고윤수 대전시 학예연구관

  • 승인 2026-09-30 16:53
  • 신문게재 2026-10-01 19면
  • 정바름 기자정바름 기자
고윤수(프로필사진)
고윤수 학예연구관
2018년,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배우 이병헌이 분한 '유진 초이'라는 인물이다. 구한말 노비로 태어난 그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도망가 미국인이 되고, 다시 미 해병대 장교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버린 조국에서 미국 국적을 버리고 다시 조선인 의병이 된다. 노비에서 미군으로, 다시 또 의병으로.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어쩌면 말도 안 될 것 같은 이런 이야기가 나름 리얼했던 것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한국의 근현대사가 그 배경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만이 그러할까. 최근 대전시는 미국에서 환수된 '송자대전판' 한 점과 이 책판의 제작 과정을 알려주는 고문서 한 점을 입수했다. 대전시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송자대전판은 흔히 생각하듯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18세기 정조대 만들어졌던 송자대전판은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고, 현재 대전 우암사적공원에 보관 중인 것은 일제강점기 그것을 다시 새긴 '중간판(重刊板)'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 발견된 「송자대전판중간소망첩」에 따르면, 그것을 중간하는데 처음 팔을 걷어붙인 이들은 다름 아닌 당대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중간사업이 1927년 마무리되었는데, 이번에 미국에서 대전시로 돌아온 송자대전판도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전시 문화유산의 첫 해외 환수 사례로 언론에 소개된 이 송자대전판은 우암사적공원 장판각에 보관된 다른 책판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활자에는 은박이 입혀져 있었고, 마구리에는 화려한 금속장식과 함께 용도를 알 수 없는 고리가 달려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전말은 이럴 것이다. 조선 유림의 큰 스승, 송자(宋子) 우암의 문집 책판이 일본군의 방화로 사라지자, 친일파들이 나서 복각을 주도했고, 몇 차례의 부침 끝에 송자대전판의 중간이 완성되고, 이를 지금의 우암사적공원이 있는 남간정사(南澗精舍)에 보관했다. 그러다 광복 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밀려든 피난민들이 책판 일부를 빼내 땔감으로 썼다(물론 이 또한 기록에 나오는 일이다.). 그렇게 난리통에 몇 점이 불타 없어지고, 또 일부는 어디론가 흩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서울 인사동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것을 1970년대 초 한 미국인이 구입해 고국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미국의 어느 가정집 거실 벽을 장식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걸려있던 송자대전판이 이번에 반세기 만에 다시 고향 대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과 송자대전판. 어느 쪽이 더 드라마 같은가. 누군가에게는 이 이야기가 더없이 흥미롭겠지만, 누군가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엄숙하고 교훈적인 교과서 속의 이야기와 달리, 사실 역사는 이처럼 온갖 아이러니와 역설, 모순과 희비극이 교차하는, 말 그대로 하나의 '스토리'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문화유산을 대할 때 기대하는 것은 어떤 교훈과 자부심, 미학적 만족보단, 이런 다사다난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에서 귀향한 송자대전판은 클리닝 작업과 보존 처리를 통해 제 모습을 찾은 뒤, 원래 다시 있던 우암사적공원 장판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신산했던 세월의 흔적을 지워내기 전, 장식품이었던 송자대전판이 지금 대전시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가을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역사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 우리 앞에 수줍고 낯설게 선 송자대전판을 만나러 가보자. 진열장 너머, 아마 아주 긴 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고윤수 대전시 학예연구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도마 퀸’ 여서정, 금빛 질주 이어간다.
  2. 부산 영도 아이들이 고른 53곳, 한 장의 지도로
  3. 국군의날 기념행사를 '국민과 함께' 원년되나
  4. 서산해미읍성, 600년 시간의 문 활짝, "서산의 맛과 사람들 한자리에"
  5. 제8대 세종경찰청장에 김보준 안보수사심의관 임명... 경찰청 경무관 인사 단행
  1. 예산장터 삼국축제 10주년…'린' 소주 20만 병에 축제 홍보
  2. 전기연 원장에 강상희교수·원자력연 원장에 정우식 교수 선임
  3. 상용화 문턱에서 좌절 '자기부상열차' 역사속으로
  4. 기계연 공기정화 자동차는 연비저감 1% 어떻게?…별도의 송풍장치 없어 가능
  5. 병무청, 논산훈련소서 현장 의견 청취

헤드라인 뉴스


"30년 시민혈세 따져보자"…대전시민사회, 수소트램 재검토 촉구

"30년 시민혈세 따져보자"…대전시민사회, 수소트램 재검토 촉구

대전시가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급전방식 변경을 고심 중인 가운데, 지역 시민사회가 현행 방식인 '수소트램'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특히 현행 수소트램의 선정 과정과 장기 운영비, 2030년 개통 가능성까지 시에 전면적인 검증을 요구했다. 대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30일 대전시청 북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민의 세금으로 30년을 감당할 사업이라면 그 결정의 근거도 시민 앞에 놓여야 한다"며 수소트램 선정과 차량계약 과정에 대한 투명한 정보 공개를 대전시에 요구했다. 이날 시민사회가 우선 문제로 꼽은 것은 민선 8기..

대전시청 선수들 아시안게임 금 4개 합작 금의환향… 오상욱은 2관왕
대전시청 선수들 아시안게임 금 4개 합작 금의환향… 오상욱은 2관왕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4개를 합작한 대전시청 소속 선수들이 금의환향했다. 30일 대전시에 따르면 펜싱 오상욱·박상원·최세빈과 근대5종 이종현이 이번 대회에서 잇따라 메달을 획득했다. 오상욱은 남자 사브르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내며 대회 2관왕에 올랐다. 박상원도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오상욱과 함께 정상에 올랐고, 최세빈은 여자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근대5종 이종현은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개인전에서도 동메달을 추가했다. 대전시청 소속 선수들은 이번 대회에서 금..

초고령화로 농협 조합원 10명 중 8명은 60세 이상… `기반 흔들`
초고령화로 농협 조합원 10명 중 8명은 60세 이상… '기반 흔들'

초고령화에 따라 농업협동조합 조합원 10명 중 8명은 60대 이상으로 나타났다. 신규 가입 조합원 역시 40대 미만은 7%대에 불과해 농협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민의힘 강승규 의원(충남 홍성·예산)이 농협중앙회의 조합원 현황을 분석해 30일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2026년 8월 기준 농협 조합원은 모두 202만 8464명으로 집계됐다. 2021년 208만 7359명에서 2022년 207만 6055명, 2023년 206만 3765명, 2024년 204만 6229명, 2025년 202만 7481명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안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뀐 무궁화호 안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뀐 무궁화호

  • ‘대전시는 수소트램 원점 재검토하라’ ‘대전시는 수소트램 원점 재검토하라’

  • 금빛으로 빛난 대전의 영웅들 금빛으로 빛난 대전의 영웅들

  • ‘나이는 숫자일 뿐’ ‘나이는 숫자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