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와 은둔의 섬 '보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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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와 은둔의 섬 '보길도'

자연미의 시인 윤선도의 세연정, 신선이 노닐것만 같아 땅 좋고 물 좋은 이 섬도 전복 팔아 외제차 모는 분주함이 함께 하는 곳

  • 승인 2016-04-28 14:08
  • 신문게재 2016-04-29 9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주말여행] 전남 보길도

▲ 세연정은 윤선도가 조성한 인공연못으로 그의 심미안이 돋보이는 곳이다.
▲ 세연정은 윤선도가 조성한 인공연못으로 그의 심미안이 돋보이는 곳이다.

“윤선도 땜시 보길도가 유명히서 많이들 찾아오는디 여그 사람들은 윤선도 좋아히들 안혀요. 윤선도가 대지주였는디 저수지 만들고 간척사업 하면서 주민들헌티 달랑 꽁보리밥 멕이고 죽도록 부려먹었당께요.” 당혹스러웠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주옥같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자연미의 시인' 윤선도에 대한 기대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뫼에 해 비친다/배 따라 배 따라/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지국총 지국총 어사와'(어부사시사 중).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바다를 은유의 미학으로 끌어올린 '어부사시사'의 시인 윤선도는 이뿐이 아니었다. “배타고 가다 손녀뻘 되는 처자를 꾀어 애를 낳게 하질 않나. 참말로 남세스럽당께요.”

보길도로 가려면 해남 땅끝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 산양진항에서 내려 차를 타고 30분 정도 달려 보길대교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버스도 없고 걷기엔 너무 먼 길이라 난감했다. 그때 검게 그을린, 해적같지만 수더분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같은 방향이라며 선뜻 태워준다고 해 한숨 놓았다. 차를 타고 가며 음료수도 나눠먹고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다 윤선도 얘길 꺼내자, 예의 '해적들'이 너털웃음을 싹 거두고 손사래를 치는 게 아닌가.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얼마나 야박했으면 후세 사람들에게까지 욕을 먹나 싶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윤선도는 조선 최고의 시인이자 정치 논객이었다. 거기다 늘그막에 '처녀 약탈'이라는 희대의 추문까지 더했으니 윤선도에 대해 흥미와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 복합적인 인간유형의 윤선도가 아꼈던 보길도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와 발걸음이 급해졌다.

전날 내린 비로 나무들은 싱싱한 녹색을 뽐내고 바람은 더없이 달콤했다. 부용동 세연정으로 가는 길을 걷다보니 물기를 머금은 논엔 벌써 독새풀이 수북히 자라 있었다. '구구 구구'. 늘 생각하지만 산비둘기의 울음소리는 왜그리도 처연할까. 섬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자그마한 초등학교 옆에 우아한 세연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연정은 윤선도가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들여 자신의 심미적 안목에 맞게 조성한 인공연못이다. 큰 바위를 옮기고 소나무도 심었다. 연못 가운데에 섬도 만들고 동대·서대에서 기생들이 춤을 추게 하면서 음주가무의 예술적 경지를 만끽했으니 환락의 극치가 따로 없었겠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옥빛을 띠며 못을 이룬 세연정은 신선이 노닐만한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제왕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지만 정치적 주류에서 밀려난 불우한 정객이었던 윤선도. 윤선도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유배와 스캔들로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들어온 부용동에서 호사를 누렸다고 해도, 소외와 적막감이 상쇄될 수 있었을까.

낙서재, 곡수당과 동현석실은 윤선도의 예술적 자양분이 응축된 곳이다. 동현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의 산세는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오르는 듯한'(芙蓉洞) 모습이 연상된다. 풍수지리에 능한 윤선도의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다시 세연정으로 내려와서 쉬었다 가려고 널찍한 바위에 배낭을 풀어놓고 앉았다. 옆 바위에서 도시락을 먹던 할머니들이랑 눈이 마주쳐 인사를 했더니 손을 까불렀다. “여그 와서 전복 좀 먹어보씨요. 산속이라 식당도 읎응께 어디 밥 묵을 디가 읎을틴디.” 할머니들이 많이 먹으라며 이것저것 반찬그릇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고롷게 잘 먹응께 참 이삐. 이것들이 다 여그서 나는 것들로 맹긍 겨. 맛있제?” 쫄깃쫄깃한 전복무침에 자꾸 손이 갔다. 전복은 보길도의 주 소득원으로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오전에 '해적들'이 한 말이 생각난다. “밖에 보이는 차들 보씨요. 외제차가 한두대가 아녀요. 전복양식해서 돈 좀 만지는 부자들이 쎄고 쎘당께.” 땅좋고 물좋고 나무 울창한 보길도는 노 정객의 은둔의 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분주한 섬이 되어가고 있다.

오후 4시 넘어 이 '육지 것'은 다시 뭍으로 기어올라왔다. 보길도를 뒤로 하고 바로 버스 타고 안녕을 고하기가 서운해 땅끝 마을을 어슬렁거렸다. 바닷가 개펄에서 한 할머니가 조개를 캐는지 등을 구부리고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게 보였다. 미끄러운 돌이 섞인 개펄을 어기적거리며 다가가 할머니를 불렀다. 톳을 뜯는단다. “톳 좀 뜯어가서 초고추장에 무쳐 묵어봐. 밥할 때도 얹어 톳밥도 히묵고. 변비에도 좋고 영양가가 많제.” 마침 오렌지 까먹으려고 가져온 과도와 비닐봉지가 있어 톳을 뜯으며 이런 거 첨 해본다며 신나서 나불거렸다. 할머니 왈, “오매, 여행 와서 이런 것도 히보구…. 출세힜어. 깔깔.”

▲가는길=서대전역에서 광주까지 기차를 타고 광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땅끝마을까지 버스를 탄다. 버스는 대전복합터미널에서 광주가는 버스를 탄다. 광주까지 2시간 30분, 광주에서 땅끝마을까지 2시간 30분 걸린다.

▲먹거리=보길도는 전복양식으로 유명해 전복요리가 다양하다. 섬이라 생선도 싱싱하다. 땅끝마을과 완도가 가까워 남도 음식을 맘껏 맛볼 수 있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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