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덕수궁 둘레길이 전하는 국권 상실의 아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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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덕수궁 둘레길이 전하는 국권 상실의 아픔들

  • 승인 2019-02-05 16:55
  • 한윤창 기자한윤창 기자
중명전 2전시실
중명전 2전시실에 재현된 을사보호조약 현장.
정동 기행을 시작하는 방법은 최근 옵션이 매우 다양해졌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덕수궁 대한문이 있는 시청역 방면에서 시작하거나 경향신문사가 자리한 정동 사거리에서 출발하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덕수궁 둘레길이 개방되면서 이제 정동은 사통팔달 교통이 좋은 길목이 됐다.

여러 루트가 생겼지만 정동 기행은 덕수궁 산책부터 시작하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높다란 빌딩숲 속 전통 궁궐이 입지한 정동의 공간 대비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국제 도시 한가운데 우리 전통이 고고하게 살아 숨 쉬는 정감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2일 오전 방문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마침 수문장교대식이 열리고 있었다. 수문장을 비롯해 참하·엄고수 등 30여 명의 출연진들이 근엄한 자세로 교대식을 연출하자 곳곳에서 관람객들의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기 때문에 수문장이 서양식 제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고유의 전통을 홍보해야 하는데 대한문 앞처럼 좋은 장소에서 제복을 보여주는 것은 아쉽다는 반론도 잇따르는 중이다.



수문장 교대식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출되고 있는 왕궁수문장교대의식 모습.
대한문을 나와 L와플집 사이로 난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강남 한복판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북만의 고풍스런 정취가 물씬 풍겨온다. 수많은 시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은 잘 알려진 대로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서울에 거주하거나 방문한 연인들 다수가 지금도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으니, 아쉽게도 그중 헤어지는 커플이 있다 해도 속설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덕수궁 돌담길
설 연휴 기간 한산한 모습의 덕수궁 돌담길.
개인적 판단에 따르면 정동의 백미는 시립미술관·정동제일교회 등으로 길이 갈라지는 교차로에 있다. 저마다의 양식을 자랑하는 근대 건축물로 둘러싸인 이곳은 국권상실기 전후의 모던한 거리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시립미술관, 단정하면서도 고풍스런 정동교회 등의 근대 건축물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 여행을 떠나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교차로의 건축물 중 가장 안정감을 주는 입면체는 러시아대사관 앞 신아빌딩. 둔중한 듯 투박한 모양새를 띠면서도 벽체에 돌출된 입면 장식이 수직감을 더하는 건물이다. 더불어 창틀 위아래로 자리한 화강암 재질의 인방이 건물에 지루함을 덜어주는 포인트로 작용한다. 일부에서는 일제 시대 특징적인 건축양식이라는 비판도 있다.

신아빌딩
신아빌딩 모습.
신아빌딩을 나서 교차로로 돌아오면 두 가지 길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 대사관저 사이로 난 덕수궁 후문 뒷길 혹은 중명전으로 향하는 정동길. 최근 모아지는 관심처럼, 덕수궁 후문 뒷길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개방되는 데는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노력이 컸다. 2011년 미국과의 토지교환을 통해 덕수궁 뒤편 '고종의 길'이 복원됐고, 영국대사관과 맞닿은 170m 구간도 지난해 완전히 개통됐다.

영국대사관 앞 덕수궁 돌담길
영국대사관과 접한 덕수궁 돌담길 모습.
이중 영국대사관과 인접한 70m 구간은 전국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자주 찾는 출사의 명소다. 철창이 설치된 영국대사관의 높은 벽돌담장과 덕수궁의 야트막한 한옥 담장이 왠지 모르게 1900년대의 국제 정세를 상징하는 것 같은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덕수궁 담장 위 기와를 어루만지며 걷다 보면 강대국 대사관 사이에서 당시 덕수궁이 처했던 위태로운 처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중명전 전시실
헤이그 특사를 소개하는 중명전 3전시실 모습.
정동기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미국 대사관저 옆 중명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구슬픈 장소다. 중명전 앞 공간은 언제부터인지 주차장에서 잔디밭으로 변해 있었다. 한층 콘텐츠가 강화된 중명전 전시공간도 견학 오는 관람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모두 4곳으로 구성된 전시실이 저마다 콘셉트를 갖고 하나의 스토리로 이어진 콘텐츠를 구성했다. 유물 전시와 유물 해설 중심이었던 기존 콘텐츠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1전시실에서는 덕수궁과 중명전의 공간성을 조명하고, 2전시실에서는 을사늑약의 상황을 인물모형 전시를 통해 현장감 있게 재현했다.

2전시실 맞은편 3전시실은 헤이그 특사 등 조약 이후 정세를 상세하게 해설하는 방이었다. 전시실에서는 초등학교 남학생 2명을 인솔한 선생님의 열띤 설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현지에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학생들은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직까지는 이준 열사가 실제 열을 받았는지에 관심이 컸다.

10대 소년들도 언젠가는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3시간의 정동기행을 마무리 했다. 근대성과 식민성이 공존하는 공간. 그 아이러니한 시대공간을 다시금 느끼며 착잡한 심정으로 정동을 나섰다.
서울=한윤창 기자 storm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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