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부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찾아가서 자신에게 물러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자식들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유산을 물러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유산을 물러주었다. 작은 아들은 유산을 물러 받자마자 이를 현금화하여 아버지와 형의 간섭을 피할 수 있는 먼 이웃나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물러 받은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다.
재산을 탕진한 다음 둘째 아들은 먹을 것이 없어 결국 돼지치기로까지 전락되었다. 하지만 돼지가 먹는 야생콩 조차 먹을 수 없는 최악의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찾아가 용서를 빌기로 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는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종으로라도 받아주기를 기대하면서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허물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감싸 않으면서 그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기쁨의 잔치를 베풀었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이렇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하루 종일 농장을 돌보다가 저녁때가 되어 종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다가 그는 종들로부터 자기 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위해 살찐 소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순간 큰 아들은 크게 분노하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의 귀환을 위해 잔치를 배설한 아버지의 처사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직접 집 밖으로 나와서 큰 아들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큰 아들은 큰 소리로 아버지께 항의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큰 아들을 향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결국 너의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산 자처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자처럼 집으로 돌아왔으니 네가 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라고 계속 설득하였다. 전반부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종결되었지만, 후반부의 이야기는 아버지가 큰 아들의 답변을 기다리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청중으로부터 답변을 기다린다.
어떻게 보면 예수가 한 이야기의 강조점은 이미 결말이 난 전반부보다도 미완성으로 남은 후반부에 있다. 전반부는 신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을 떠난 인간은 비참한 자리에 떨어지지만, 언제든지 신에게 돌아오면 신은 항상 인간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영접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후반부는 인간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은 인간을 한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려하지만 인간은 서로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은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계속 요구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이야기의 강조점은 전반부보다도 미완성인 후반부에 있다. 그렇지만 렘브란트는 전반부에 초점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렘브란트가 전반부의 작은 아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생애 말년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었고 파산선고를 받아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의 돌파구로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그림은 자화상이다. 또 하나는 렘브란트의 그림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는 계몽주의 시대였고,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보다도 신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었다. 내가 어떻게 형제자매들과 이웃들과 잘 지낼 수 있는가하는 문제보다도, 내가 어떻게 신으로부터 용서 받고 신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런데 진작 예수의 이야기는 신과 우리와의 관계 못지않게 너와 내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후반부의 이야기를 미완성으로 둠으로써 신은 자신과의 관계보다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렘브란트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람들, 특별히 크리스천들까지도 너와 나의 관계를 등한시하고 신과 나의 관계만 좋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최갑종(백석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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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종 백석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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