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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티 이미지 뱅크 |
포옹하는 딸을 껴안은 아빠는 이 세상 모든 걸 가진 양 득의만면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빠는 다 '딸바보'다. 자신의 딸을 각별히 아끼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신조어가 '딸바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일 터.
그처럼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양손에 쥔 아빠와 엄마가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졸업시즌이고 보니 우리 딸이 고등학교 졸업하던 날이 생각나네…" 아내의 회고(回顧)에 필자의 기억 또한 지난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했다.
사랑하는 딸내미는 고교시절에도 줄곧 전교 1등을 달렸다. 하지만 1997년에 닥친 IMF 경제 위기 이후 더욱 쪼그라든 필자의 경제적 운신은 심지어 딸의 등록금도 벌지 못하는 극한상황으로까지 내몰렸다.
학교에선 딸에게 장학금과 기타의 골고루 배려까지 아끼지 않으며 응원했다. 그 결과, 딸은 마침내 출신고에서 유일무이 S대학교에 합격하는 기쁨을 창출했다. 우리 가족은 S대 합격증을 보면서 너무 기뻐 딸을 껴안으며 울었다.
대학생이 되어 상경한 딸은 우수한 성적 덕분에 대학원 졸업 때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장학금을 받았다. 그 즈음부터 장학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해 기부를 결심했다. 하지만 필자처럼 쥐뿔도 없는 박봉의 경비원에게 있어 과연 기부라는 건 타당한 얘기일까?
이에 대한 고민이 숲을 이룰 무렵 어딘가를 가던 중이었다. 마침맞게 유니세프에서 나온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회원 유치 홍보를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으로 이어졌다. "나 같이 없이 사는 사람도 기부할 수 있나요?" "그럼요~ 마음만 있으셔도 됩니다!"
주저 없이 후원회원에 가입했다. 이후 "홍경석 후원자님, 유니세프 가족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안내문이 우편으로 도착했다. 그렇게 유니세프 후원자가 된 뒤로 매달 일정액의 후원금이 금융기관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하지만 출금이 되었다는 안내 문자메시지를 보는 순간의 느낌은 곧바로 희열과 연관된다. '아,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맛에 기부를 하는 게로구나!' 2018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6학년'으로 진학(?)했다. 예순 살을 달리 이르는 6학년은 이순(耳順)과 동격이다.
공자가 위정편(爲政篇)에서 말하길 이순이 되면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어도곧 이해가 된다고 했다. 이에 걸맞게 올부터 빼고(-) 더한(+) 것이 바로 금연(禁煙)과 기부(寄附)다. 먼저, 40년 이상을 피워온 담배를 끊은 건 치아의 급격한 망가짐에서 기인했다.
잇몸까지 약한 탓에 예전부터 김치깍두기처럼 딱딱한 반찬과 음식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다가 더욱 붕괴된 치아는 급기야 밥은커녕 죽이나 겨우 먹을 정도로까지 악화되었다. 충격이었다! 세월에 장사 없다지만 이렇게까지 늙다니…….
이래서야 오는 봄의 아들 결혼식 때 역시도 이를 내보이며 사진이나 찍을 수 있을까? 결론이 나왔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금연하자! 금연은 서서히 해서는 안 된다는 금연 성공자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단칼에 끊는 게 상책이란 결심이 섰다.
담배와 재떨이에 이어 라이터도 죄 버렸다.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아내와 직장의 동료들에게도 금연한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하지만 금연에 따른 금단증상은 심각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엉거주춤의 반복은 기본이었다.
'딱 한 모금만 빨고 다시 금연할까?'라는 미련과 아쉬움 역시 무시로 피어나는 뭉게구름이었다. 그럴 적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아들의 고3 시절을 상기하자!' 당시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다. 빚쟁이들의 다그침에 우울증까지 찾아와 힘들었다.
폭음을 하면 아내와 다투는 날도 잦았다. 설상가상 아들의 당연한 반발까지 불러왔다. "대입 수험생이 있는 다른 집에선 발자국 소리까지 줄인다는데 우리 집은 왜 이래요?" 쇼크를 받은 이튿날부터 금주에 돌입했다.
그리곤 그해 수능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여덟 달 이상이나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셨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난생 처음으로 시도한 금연 역시도 남다른 오기와 자존심이 그 토대를 이루었다는 느낌이다.
도행역시(倒行逆施)란 차례나 순서를 바꾸어서 한다는 뜻인데 흡연이 바로 이 범주가 아닐까 싶다. 십대 시절 괜스런 치기 탓에 배운 게 담배였다. 이후 한 번도 끊어본 적이 없었는데 건강과 직결되다보니 결국엔 금연으로까지 이어졌다.
혹자는 금연을 단순히 건강과 연결하기보다는 경제적 측면으로 접근하라고 조언한다. 예컨대 갑 당 4천 원짜리 담배를 한 달만 안 피워도 10만 원 이상을 절약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돈으로 저축을 하거나 기부를 하면 금상첨화라는 것이다.
필자의 유니세프를 통한 기부는 물론 금연 후에 이뤄진 일이 아니다. 그렇긴 하더라도 기부는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오래 전부터 기부를 실천하고 있는 아들이 집에 오면 금연과 더불어 기부까지 한다는 이 아빠를 칭찬할 게 틀림없다.
'금연'이라는 나름, 그리고 자못 웅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적극 실천하는 즈음이고 보니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지난날을 추적해 보고픈 맘이 똬리를 틀었다. 필자의 글 '2017년 4월 16일자 - [가요는 삶의 축] 102. 담배 가게 아가씨' - 에서도 다루었지만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와 경로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런저런 기록과 문헌 등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광해군 때인 1608년~1618년쯤 일본에서 전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에 와선 백해무익(百害無益)으로 알려진 담배. 그 담배를 인디언이 피우는 것을 보고 전파했다고 알려진 인물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다.
이탈리아의 탐험가였던 그는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를 떠난다. 이후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으며 특히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 = West Indies)는 남.북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있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호상열도(弧狀列島)를 뜻한다. 대서양과 그 부속해인 멕시코만과 카리브해가 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제1차 항해 때 산살바도르섬에 상륙한 이래, 그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오인한 데서 '서인도'라는 호칭이 생겼다. 콜럼버스가 산살바도르에 상륙하자 원주민 인디언들은 콜럼버스에게 거울을 받은 답례로 담배를 주었다고 한다.
15세기말에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가지고 간 담배가 16세기 말에는 일본과 중국 등지로까지 퍼져 나갔다고 하니 그 속도의 빠름에서 담배는 역시나 중독성이 대단하다는 걸 웅변하고 있다. '남초(담배)는 사형으로도 못 막았다'는 글을 보면 담배의 심각성을 더욱 발견하게 된다.
- 담배가 조선에 처음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고 인조 이후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효종 때 조선에 머물렀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조선에서는 불과 4~5세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에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청나라에서도 담배가 문제되어 일본은 1609년 금연령에 이어 1612년 담배 재배 금지령을 내렸다. 청나라도 1639년 청 태종 숭덕(崇德) 4년에 흡연자를 사형에 처하는 법령까지 공포하였으나 모두 흡연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
경험해봐서 잘 아는데 흡연이라는 습관은 지독한 중독을 수반한다. 담배란 일단 한 번 피우기 시작하면 대부분 중독의 길로 들어서게 되므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없다. 술보다도 폐해가 크다고 인식된 담배는 경술국치를 겪으면서는 일본인 제조업자들이 그 이익을 독차지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연초세'와 '연초전매제'가 도입되면서 일제의 통치자금 마련의 주요 재원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난해 담뱃세가 11조 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3년 연속 10조 원을 돌파했다.
이는 아직도 흡연인구가 상당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담배가격의 인상은 또 다른 어두움을 전파시켰다. 가격인상에 따른 흡연구역의 확대는커녕 마치 토끼몰이라도 하는 양 범죄시하는 분위기로까지 그 저변을 팽창시켰다.
그 결과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합법적 흡연공간엔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맞담배질을 하는, 그야말로 '개판 오분 전'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어쨌든 만약에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랬더라면 필자 역시 수십 년 동안이나 허공에 연기로 돈을 날리는 어처구니없는 작태는 보이지 않았으리라. '세상에 요망한 풀'이라고도 했던 담배의 폐해를 알고도 금연을 실천하지 않았던 필자의 무지를 만시지탄이되 반성한다.
늦게나마 '철이 들어' 금연을 실천하고 아울러 기부까지 하게 되었으니 지난 세월의 실수를 조금은 만회하는 듯도 싶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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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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