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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로만 살펴도 눈물이 성큼 솟는 노래다. 이를 노래로 들으면 참았던 눈물의 댐이 그예 와르르 붕괴되기에 이른다. 이 노래는 지난 1972년도에 발표된 오은주의 <엄마 엄마 돌아와요>라는 가요다.
1966년생인 가수 오은주는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해서 '천재 꼬마 가수'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7세가 되던 해에 공연극장무대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되면서 가수로 데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엔 대중들에게 별 관심을 얻지 못하고 거의 무명생활을 지내야만 했다. 오은주는 1982년에 트로트로 전향하여 정상에 서기 위해 노력하여 1988년에 〈지나가는 비〉라는 곡으로 호응을 얻기 시작, 1990년에는 신파조의 가사와 여성의 진솔한 심정을 실은 트로트 <돌팔매>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정상급 인기가수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 노래가 발표되었던 1972년도의 필자 나이는 만 열 셋의 소년이었다. 엄마는 필자의 생후 첫돌 즈음인 진즉에 집을 나갔기에 얼굴조차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엄마 엄마 돌아와요!"라고 절규해봤자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 아들이 학교에 가는 것조차 마뜩잖았던 홀아버지께선 만취하시면 그깟 학교는 뭣하러 가느냐고 역정을 내셨다. 어쨌든 이어지는 <엄마 엄마 돌아와요> 가요의 다음 가사가 또 다시 심금을 울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어제는 철이가 어찌나 울기에 학교를 데리고 갔었어요. 철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놀게 하고 나는 공부를 하는데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나잖아요, 엄마. (중략) 연탄불도 꺼져버린 싸늘한 방에 배가 고파 우는 동생 자장가로 달래면서 오늘도 엄마소식 기다립니다."
노래를 부른 소녀의 어머니가 어떠한 곡절로 집을 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남아있는 가족들, 특히나 자녀들은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는 건 상식이자 경험의 '팩트'다. 가장이길 포기한 아버지로 말미암아 연탄불도 꺼져버린 냉방에서 살았다.
따라서 한겨울에 잠을 이루자면 초인적인 참을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난방용 연탄을 들이고 약간의 쌀이라도 사자면 필자라도 나서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또래들이 중학교에 갈 때 소년가장이 되어 역전으로 떠밀렸다. 그리곤 거기서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행상 따위로 비굴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요즘 어린이들은 연탄을 잘 모를 것이다. 허나 30대 이상만 되어도 연탄을 모르면 '간첩'이다. 연탄(煉炭)은 우리나라에서 요리나 난방용으로 사용되던 가공된 무연탄이다. 석탄 가루와 접착성 물질의 혼합인 연탄은 특히나 겨울철에 큰 사랑을 받았다.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하여 구공탄, 혹은 구멍탄이라고도 불렀다. 연탄을 가정의 난방용으로 사용하는 경우, 겨울엔 1~3개 정도를 매일 소모했다. 이마저 아끼고자 바람이 통하는 구멍을 아예 막아놓기도 일쑤였는데 그러다보면 연탄불이 꺼지는 경우도 왕왕 발생했다.
새로운 연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새 연탄을 다 타가는 연탄 위에 올려놓았다. 불이 붙는 데는 보통 30분 이상 소모되었는데 이때 많은 일산화탄소가 발생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는 사람도 속출했었음은 지난 시절 가난했던 세월의 아픔이다.
연탄은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수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의 한 지방에서 목탄의 대용품으로 쓰기 위해 석탄에 구멍을 뚫어 사용하던 것이 연탄의 유래라고 한다. 화력이 강하면서도 오래 타고 다루기 쉬우며 경제성도 높아서 1950년대 이후 가정의 난방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인기가 계속되어 1988년에는 가정의 78%가 연탄을 난방의 주연료로 사용했다. 지금과 달리 지난 시절 연탄을 가장 많이 사용한 곳은 단연 부엌이었다. 부엌은 옛날부터 여성들에게 친밀한 장소였다.
주부가 어쩌면 평생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매일의 가족들 식사 준비뿐만 아니라 계절마다 장 담그기와 젓갈 담그기, 김장 담그기 등의 일을 하면서 한 해의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일이 부엌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어머니들은 며느리가 들어와도 부엌과 관련된 일은 선뜻 넘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엌은 또한 여성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며느리들은 아궁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시집살이의 설움을 달랬으며, 부지깽이로 모르는 글자를 남몰래 써보는 배움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부엌의 기능은 그러나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가스가 보급되자 부엌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방이나 거실과 분리된 구석진 곳에 있던 부엌이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래서 지금은 촌스럽게 부엌이라고 안 부르고 '주방'이라고 한다. 1980년대까지 꾸준히 올랐던 연탄의 인기는 하지만 점차 줄어들기에 이른다.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가스보일러나 기름보일러를 사용하게 된 때문이다.
최근에는 가정용 난방보다는 하우스 농업의 난방이나 음식점의 요리용 연료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연탄이 호시절일 때 탄광촌에서는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말도 전설이 된 지 오래다.
대기오염 등의 환경문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선 연탄이 더 이상 자원의 고갈로 말미암아 원료 채탄조차 어려운 때문이다. 한데 지금도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서민과 빈민들이 적지 않다.
기관과 기업, 사회봉사단체 등지에서 겨울이면 연례행사인 양 '사랑의 연탄나누기' 행사를 하는 건 아직도 연탄이 난방과 취사의 소중한 도구임을 새삼 발견케 하는 대목이다. 필자 역시 지난날엔 무려 10년 이상이나 연탄과 함께 생활했다.
그런 짠돌이 생활의 견지 덕분에 아이들을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었음은 돌이켜보건대 연탄이 베풀어준 어떤 짠한 감사함이다. 어쨌든 엄마는 하늘이 천사를 대신하여 보낸 거룩한 존재다. 하지만 자식을 버리는 순간 그 엄마는 더 이상 천사가 아니라 '악마'가 된다.
어떡해서든 아이들에게만큼은 필자의 비참했던 지난날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면 아내, 즉 아이들의 '엄마'가 집을 나가선 결코 안 되었다! 거기에 최우선의 과제를 부여하고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다.
덕분에 아내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어언 37년이다. 다음 달의 아들 결혼을 앞두고 아내는 더욱 분주한 발걸음의 나날이다. 아들에겐 뭘 해줄까, 며느리에겐 뭐가 어울릴까…….
<엄마 엄마 돌아와요>로 데뷔한 오은주는 <돌팔매>로 다시금 부동의 스타로 거듭 났다. 이 노래의 가사 역시 의미심장하긴 매한가지다. '누군가 생각 없이 무심코 돌을 던졌다지만 그로 말미암아 내 가슴은 멍이 들었네'가 바로 그것이다.
필자의 엄마는 60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허나 아버지께서 작고하신 지도 30년이 넘었다. 또한 엄마가 '한을 품은' 대상은 사실 필자가 아니지 않았던가!
필자는 예전에 이미 멍이 들어도 너무나 단단히 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초처럼 질긴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울 적마다 <노인과 바다>의 글에서 본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강조한 헤밍웨이의 명언을 떠올린 덕분이다.
절친한 친구는 필자를 일컬어 "가히 트리플크라운(triple crown)에 빛나는 엘리트 학력 가족을 두어 부럽다"고 칭찬한다. 이러한 칭찬보다 필자가 더 중시하는 부분은 작금 5060세대를 짓누르는 악재인 '더블케어'의 부담에서도 해방된 때문이다.
노부모와 성인이 된 자녀를 함께 부양하는 두 가지 짐을 동시에 지는 경우를 더블케어(Double Care)라고 한다. 일본에서 나온 신조어로 우리나라 50~60대의 국민 34.5%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은퇴열차는 저만치 와서 서 있는데 '더블케어'라는 현실이 어서 탑승하라며 독촉을 하는 것처럼 대략난감이 또 없다. 여기에 설상가상 손자의 육아까지 맡는 경우라고 한다면 이는 곧바로 '트리플케어'가 된다.
필자가 비록 박봉으로 여전히 헉헉대긴 하지만 딸과 사위에 이어 아들의 처남 또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한 재원(才媛)과 수재들이 포진하고 있음에 여기서 위안을 삼는다. 이 또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마치 뜨거운 잉걸의 연탄불처럼 그렇게. 만약에 연탄이 없었다면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을 과연 어찌 견뎠을까 싶다. 완연한 봄이다. 그래서 연탄은 잠시 잊어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다시금 추운 겨울이 닥치면 잊었던 모정(母情)을 떠올리듯 그렇게 연탄의 따스함을 찾을 게 틀림없다. 끝으로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겠지만 연탄을 최초로 발명했던 그 누군가에게 진정 감사의 술을 철철 넘치도록 따라주고 싶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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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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