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그 대구탕집에 장미희는 없었다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그 대구탕집에 장미희는 없었다

  • 승인 2019-12-18 10:15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대구탕
'어르신들, 제가 엿듣고 있다는 거 아시죠?' 대구 살을 쩝쩝 씹으며 옆자리 식탁을 힐끗 쳐다봤다. 일행 중 한 할아버지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거기까지였다. 왜냐면 할아버지 마나님이 맞은 편 동생부부에게 열변을 토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서울서 내려온 자매 부부인데 언니 되는 할머니가 자식들에게 서운함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임 쏘 해피. 난 지금 행복해. 그렇지만 자식 다 소용없는 거야." 짭조름하면서 시원한 대구탕 국물을 떠 먹으며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자식들에게 10억씩 나눠줬는데 하는 짓이 불한당이라는 것이다. 중간 중간 영어를 섞어 쓰는 할머니는 꽤나 교양있어 보였다. 아무리 똑똑해도 자식 앞에선 냉정할 수 없는 지라 미리 유산을 물려주고 보니 자식들은 받을 거 받았으니까 됐다는 식인 것이다. "투 레이트. 너무 늦었어. 걔네는 걔네고 우린 여행 다니고 즐겁게 살거야." 세상에 완벽한 행복은 없는 법. 그래도 노부부가 팔도 유람다니며 맛있는 거 먹고 살면 성공한 거

아닌가.



오래 전 어느 신문 기사에서 본 장미희가 부산에 올 때마다 들른다는 해운대 대구탕이 생각났다. 장미희가 단골이라는 대구탕집 아냐고 달맞이 고개 주민들한테 간절하게 물었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대구탕집은 있다고 알려준 식당이었다. 식당 이름이 그냥 '속시원한 대구탕'으로 대구탕은 단순하고 허세가 없었다. 재료는 대구, 무, 파가 전부인 듯 했다. 국물이 맑을 거라 생각했는데 약간 진했다. 직장생활 하면서 양념이 과한 식당밥을 오래 먹은 탓인 지 단순한 음식이 당긴다. 부산 할매가 끓인 대구탕은 엄마가 해주는 그런 음식이었다. 대구탕과 밥 한 공기 싹 비웠지만 옆자리 얘기 엿듣는 데 재미 붙인 바람에 뭉그적거리면서 파래김만 쪽쪽 찢어먹다 겨우 일어났다.

부산은 역동적이다. 이국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깨를 부딪히는 사람 거개가 외국인이다. 빈부의 차이도 확연하다. 해운대는 나같이 돈 없는 사람 기죽이기 딱 좋은 곳이다. 내년 초 입주한다는 101층짜리 엘시티는 고개를 90도 젖히고 올려다봐야 한다. 사람들 패션감각도 외국의 어느 휴양지 저리 가라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온 몸을 문신으로 도배한 여자를 만났다는 거다. 그녀와의 조우는 달맞이 고개 리조트 뺨치는 찜질방 사우나탕에서였다. 푸르딩딩한 용 문신이 까무잡잡한 온 몸을 휘감아 도는데 정말이지 한 마리 용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정도 문신이면 업계에서 한 자리 하는 여자겠지? 해운대파 오야붕? 난 잔뜩 흥분해 그녀가 있는 온탕으로 직행했는데 벌떡 일어나 냉탕으로 가버리는 게 아닌가. 조금 있다 내가 그쪽으로 가자마자 오야붕은 때 미는 자리로 갔다. 거 참, 썰 좀 풀자는데 되게 비싸게 구시네. 누아르 언니와의 랑데부 불발로 난 식혜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행 마지막 날 생각했다. 퇴직하면 영도 흰여울마을에서 한번 살아볼까. 부산항과 남항이 한눈에 보이는 곳. 이 마을은 피란민 정착지로 전망이 죽여준다. 바닷가 경사지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문만 열면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여기서 라면집 하는 남자도 그 멋에 들어왔는데 생계가 안 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노을 하나는 끝내준다며 강추했다. 노을빛이 매일매일 다르단다. 여름 태풍 때 성난 상어처럼 으르렁거리는 너울도 장관이라고 했다. 뭐 어때, 김치 하나 놓고 밥 먹으며 강아지 키우면서 살면 되지. 가끔 냉이 넣은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이고 낚시로 잡은 생선 구워 올리면 진수성찬일거야. 볕 좋은 날엔 빨래해서 마당에 널고 라디오 들으며 김치전 부쳐 먹고 낮잠도 자는 근사한 인생! 누군가 그러길, 상상력이 풍부하면 인생이 피곤하다고 했는데.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합강동 스마트시티, 'L1블록 643세대' 본격 공급
  2. 과기정통부 '출연연 정책방향' 발표… 과기계 "기대와 우려 동시에"
  3. 최저임금 인상에 급여 줄이려 휴게 시간 확대… 경비노동자들 방지 대책 촉구
  4. 장철민 "새 충청은 젊은 리더십 필요"… 대전·충남 첫 통합단체장 도전 의지↑
  5. 한남대 이진아 교수 연구팀, 세계 저명학술지에 논문 게재
  1. 김태흠 충남지사 "대통령 통합 의지 적극 환영"
  2. 학생들의 헌옷 판매 수익 취약계층 장학금으로…충남대 백마봉사단 눈길
  3. 한국산업은행 세종지점, 어진동 단국세종빌딩에 둥지
  4. 세종충남대병원, 지역 보건의료 개선 선도
  5. 세종청년센터, 2025 청년 도전과 성장의 무대 재확인

헤드라인 뉴스


이장우 "김태흠 지사와 충청 미래를 위해 역할 분담할 것"

이장우 "김태흠 지사와 충청 미래를 위해 역할 분담할 것"

이장우 대전시장이 이재명 대통령의 적극 추진으로 급물살을 탄 대전·충남 행정통합의 단체장 출마에 대해 "김태흠 충남지사와 함께 충청의 미래를 위해 역할분담을 나눌 것"이라고 밝혔다. 이 시장은 19일 대전시청 기자실에서 가진 오정 국가시범지구(도시재생 혁신지구) 선정 관련 브리핑에서 대전충남행정통합시장 출마 여부에 대한 질문에 "통합시장을 누가 하고 안 하고는 작은 문제이고, 통합은 유불리를 떠나 충청 미래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출마는) 누가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과도 상의할 일이다. 김태흠 충남지사와는 (이..

`2025 도전! 충청남도 재난 안전 골든벨` 성료… 퀴즈왕 주인공은?
'2025 도전! 충청남도 재난 안전 골든벨' 성료… 퀴즈왕 주인공은?

청양 목면초등학교 4학년 김가율 학생이 2025 충남 재난 안전 퀴즈왕에 등극했다. 충청남도, 중도일보가 주최하고, 충남교육청, 충남경찰청이 후원한 '2025 도전! 충청남도 재난 안전 골든벨'이 18일 예산 윤봉길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번 골든벨은 충남 15개 시군 퀴즈왕에 등극한 학생 및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모여 충남 퀴즈왕에 도전하는 자리로, 272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행사엔 전형식 충남도 정무부지사, 남도현 충남교육청 기획국장, 김택중 예산부군수, 유영돈 중도일보 사장, 최재헌 중도일보 내포본부장 등이 참석해 퀴즈왕..

충남 천안·보령 산란계 농장서 고병원성 AI 의사환축 잇따라 발생
충남 천안·보령 산란계 농장서 고병원성 AI 의사환축 잇따라 발생

충남 천안과 보령 소재 산란계 농장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H5형)가 잇따라 발생했다. 충남도에 따르면 17일 충남 보령시 청소면, 천안시 성환읍 소재 농장에서 폐사가 증가한다는 신고가 접수돼 동물위생시험소가 확인에 나섰다. 충남 동물위생시험소가 18일 확인한 결과, H5형이 검출돼 농림축산검역본부에 고병원성 여부 검사를 의뢰했다. 검사결과는 1~3일가량 소요될 예정이다. 성환읍 소재 농장은 과거 4차례 발생한 사례가 있고, 청소면 농장은 2022년 1차례 발생한 바 있다. 현재 성환읍 소재 농장에서 사육 중인 가금류 22..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성금으로 잇는 희망…유성구 주민들 ‘순회모금’ 동참 성금으로 잇는 희망…유성구 주민들 ‘순회모금’ 동참

  • 시니어 모델들의 우아한 워킹 시니어 모델들의 우아한 워킹

  • 딸기의 계절 딸기의 계절

  • 보관시한 끝난 문서 파쇄 보관시한 끝난 문서 파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