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딸기 익는 계절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딸기 익는 계절

  • 승인 2020-06-10 10:18
  • 수정 2020-09-01 10:37
  • 신문게재 2020-06-11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1222816398
게티 이미지 제공
나에겐 특별한 영화가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가 그렇다. 고등학교 입학한 그 해 봄, 태어나서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가 '테스'였다. 내가 다니던 시골 중학교에선 종종 관광버스를 대절해 공주에 있는 극장으로 단체 관람을 가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엄혹한 시절, 나의 세대는 극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다 대처인 공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극장구경이란 걸 하게 됐다. 그 날은 설레는 마음에 점심 도시락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영화를, 그것도 '테스'를 보게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단체로 영화관람 하는 날이어서 수업도 일찍 끝내고 친구들과 극장으로 달려갔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압도하는 듯한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테스(나스타샤 킨스키)가 딸기를 먹는 장면 말이다. 더버빌 가의 바람둥이 청년 알렉은 테스에게 딸기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테스는 "좋아해요. 딸기철이 되면요"라고 대답한다. 알렉은 잘 익은 딸기 하나를 골라 꼭지를 쥐고 테스의 입에 디민다. 머뭇거리던 테스는 결국 탐스럽게 익은 빨간 딸기를 붉은 입술을 열고 받아 먹는다. 겁먹은 듯 커다란 눈의 테스는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알렉이 주는 딸기를 계속 먹게 된다. 알렉의 음흉스런 속셈을 순결한 여인 테스가 알 리가 없다. 테스의 꽃같은 입술에 들어가는 딸기는 비극적 재앙의 씨앗임을 암시한다. 딸기는 순진한 아가씨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선악과인 셈이다.

딸기만큼 맛있는 과일도 없다. 딸기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온다. 초록의 무성한 잎사귀 밑에서 수줍게 매달린 딸기. 어릴 적 우리 집 담장은 돌과 흙이 버무려진 토담이었다. 담장 아래엔 철따라 꽃들이 피었다. 과꽃,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꽃 그리고 딸기가 있었다. 딸기는 작고 볼품없이 맺힐 뿐 탐스런 열매는 보기 힘들었다. 어느날 이파리들을 손으로 들추다 큼지막한 딸기 하나를 발견했다. 응달진 돌 틈에서 사람 눈에 띄지 않아 온전하게 자란 것이다. 딸기는 채 익지 않아 반은 빨갛고 반은 푸르스름한 흰색이었다. 노란 씨앗이 주근깨처럼 단단하게 박힌 딸기를 살짝 베어 물자 새콤함이 입 안에 퍼지면서 침샘이 마구 터졌다.

이제 딸기는 한겨울에도 먹는다. 마트에 가면 주먹만한 딸기가 진열돼 있어 도대체 딸기철이 언제인지 헷갈릴 정도다. 나는 추운 겨울에 나오는 딸기는 당최 손이 안 간다. 입안에 넣으면 서늘하고 스폰지를 씹는 느낌이 영 별로다. 비록 하우스 딸기지만 봄볕을 받는 4월쯤 돼야 사다 먹는다. 간혹 제철 딸기를 운 좋게 먹기도 한다. 집 근처 금요장터에선 대전 근교 농부들이 재배한 신선한 농작물이 직거래된다. 작년에도 초여름 기운이 물씬 느껴질 즈음 진짜배기를 만났다. 소쿠리에 가득 담긴 검붉은 딸기. 송홧가루가 노랗게 앉은 걸로 봐서 제철딸기가 틀림없었다. 크기도 하우스 딸기보다 훨씬 작았다. 아주머니가 맛보라며 하나 건넸다. 달콤한 향이 진했다. 몇 개를 더 먹어보고 딸기 소쿠리를 얼른 안았다.

무르익은 딸기는 연약해 손으로 누르면 쉽사리 으깨진다. 짓이겨진 딸기에서 나오는 빨간 물은 옷에 묻으면 지워지지 않는다. 딸기를 먹으면 비련의 여인 '테스'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딸기는 성적 메타포다. 딸기는 또한 살인을 저지르는 테스의 핏빛 운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안개 자욱한 스톤헨지에서 경찰에 압송되는 테스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자막이 나온다. 나는 테스의 기구한 운명에 화가 나 가슴이 떨렸다. 만약에, 반대로 테스가 알렉의 입에 딸기를 넣으며 유혹한다면 어떨까. 남자들을 실컷 농락하고 버리는 팜므파탈 영화가 되려나? <우난순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영화·드라마' 촬영 명소로 간다
  2. 두 자녀 태우고 만취운전 30대 사고까지…여름철 엄격 단속 필요
  3.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①대전 전통산업과 특화거리의 탄생과 번영…그리고 존폐의 기로
  4. K리그 휴식기, 대전 서포터즈는 '청소' 중?… "승리의 기운을 줍습니다"
  5. 창업기업 74곳에 최대 4억원 '대전 창업기업 들썩'
  1.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2.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3. 천문연구원, 희귀 왜소신성 발견…공전주기 짧아 중요 연구대상
  4. 충청권 7월 본격 장마 예상…올해 평년보다 강수량 많아 '주의'
  5. 대전 보건소 인력부족에 '허덕'…전국 광역시 중 가장 적어 보건의료 '빨간불'

헤드라인 뉴스


대형 참사 잇따른 대전서 `119 정밀위치추적` 전국최초 실증 나선다

대형 참사 잇따른 대전서 '119 정밀위치추적' 전국최초 실증 나선다

대전에서 대형 참사가 잇따르며 구조 골든타임의 중요성이 커진 가운데, 구조대상자가 있는 층수와 함께 15m 오차로 위치를 파악하는 기술이 대전 소방 현장에서 전국 최초로 시작된다. 대전 안전공업 화재 당시 국가소방동원령 발령 이후에도 일부 요구조자가 유가족과 통화를 이어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난 현장에서 요구조자의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번 정밀위치측정 기술의 구조 현장 적용 여부에 관심이 더 쏠리는 이유다. 2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소방청, 대전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긴급구조..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이 2030년 하반기로 지연된다고 대전시가 공식 인정했다. 당초 2028년 개통보다 2년여가 더 늦어지는 것으로, 주요 공정 리스크와 차량 시운전 계획 반영 등을 이유로 꼽았다. 유득원 대전시 행정부시장은 23일 대전시청 기자회견장에서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관련 브리핑을 갖고 "향후 통합공정 계획 수립을 통해 개통 일정 등을 최종 확정할 것"이라면서 개통 지연을 공식화 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총연장 38.8㎞, 정거장 45곳, 차량기지 1곳 규모로, 2024년 12월 착공해 현재 본선 14개 전..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중구 중촌동 맞춤패션거리와 정동 인쇄거리, 원동 한복거리 등 과거 대전을 상징하던 유서 깊은 산업 자산들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붙여진 특화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급격한 산업 구조 변화와 유통 시스템 현대화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간 채 존폐의 기로에 서면서다. '생산의 효율화'란 거대한 산업 발전 흐름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모든 가치를 장악하고 있지만, 지역의 고유한 숨결과 정체성이 담긴 전통산업의 흔적이 미래세대에 적절히 계승돼야 마땅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낡은 산업의 미래를 새..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