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단 물이 뚝뚝 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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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단 물이 뚝뚝 떨어지는

  • 승인 2021-08-25 11:11
  • 신문게재 2021-08-26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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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제공
퇴근 길에 복숭아 한 보따리를 샀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시골에서 온 듯한 중년의 부부가 팔고 있었다. 부부는 대전 근교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서둘러 설거지를 끝냈다. 거실 한 켠에 놓은 복숭아 향이 사방팔방 진동해 침샘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주먹만한 복숭아 하나를 씻어 개수대 앞에서 바로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향이 입 안에 퍼지면서 5백원짜리 동전이 들어갈 만큼 콧구멍이 커졌다. 아! 여름향기다. 물렁한 부분은 껍질을 살살 벗겨 내고 먹었다. 다디단 과즙이 줄줄 흘렀다. 입 주위는 물론이고 콧망울에도 흥건하게 묻었다. 옹달샘처럼 넘치는 과즙은 금세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듯이 손가락에 묻은 단 물을 게걸스럽게 핥아먹었다. 어느 소설가는 복숭아는 체면 차리면서 먹는 과일이 아니라고 했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백번 공감할 것이다. 껍질이 터지기 직전의 물렁한 복숭아가 좋은 이유다. 향기롭고 달콤한 복숭아.

신묘한 향으로 군침을 돌게 하는 복숭아는 옛 중국에서 영적인 과일로 대접받았다. 도교 사상이 강한 중국인에게 '무릉도원'은 이상향의 상징이었다. 무릉도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연유되는데 거기에 복숭아나무가 나온다. 물고기를 잡던 어부가 어느 날 길을 잃고 헤매다 낙원에 들어간다는 얘기. 전쟁도 없고 고통도 없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서 꿈같은 나날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 곳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는 별천지. 그런데 어부가 들어갔던 선계(仙界)엔 복사꽃이 만발했다지 않은가. 달콤한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하고 분홍의 꽃잎은 바람결에 하늘하늘 날리고 말이지. 속세의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별천지와 복사꽃. 그 곳 사람들도 여름이면 흘러내리는 복숭아 과즙을 쪽쪽 소리나게 빨아먹었으려나?

복숭아는 생김새와 성질상의 이유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수밀도의 네 가슴'. 이육사의 시 '나의 침실로'에 나온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미혼의 남자 선생님이 수밀도를 설명하면서 곤혹스런 표정을 짓던 기억이 떠오른다. 수밀도는 살과 물이 많고 맛이 단 복숭아의 한 종류다. 선생과 학생들은 수밀도와 마돈나의 가슴을 매치시킨 시인의 시적 메타포에 대해 불온한 상상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복숭아의 보송송한 솜털은 또 어떤가. 과일 중에서 오직 복숭아만 갖고 있는 솜털. 그런데 이 솜털은 알레르기를 유발해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 복숭아가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네 가족이 박 사장네 집에 들어갈 때 걸림돌인 문광을 쫓아내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기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손에 든 복숭아를 입으로 후우 불자 허공에 날리는 솜털이 은가루처럼 반짝인다. 영화에서 복숭아의 활약은 가히 스펙터클했다.

어릴 적 내 고향 집엔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야트막한 흙담 옆의 키가 훌쩍 큰 토종 복숭아나무였다. 먹을 게 흔하지 않던 시절, 복숭아는 우리 식구들의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다란 장대로 발그스름한 복숭아를 따 먹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먹어야 했다. 한 입 우적 씹다 꼬물거리는 벌레를 뱉어내는 게 다반사였다. 복숭아는 조그맣고 볼품없었지만 새콤달콤하면서 향이 진했다. 어느 핸가 엄마는 좋은 것만 골라서 양철 함지박에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걸어 장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엄마 손에 쥐어진 돈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엄마는 헐값에 팔고 싶지 않았지만 그걸 다시 이고 온다는 게 엄두가 안 나 그냥 팔고 왔다. 그 복숭아나무는 몇 년 후 늙고 병들어 베어졌다. 더위도 한풀 꺾였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먹는 푹 익은 복숭아는 더 달고 맛있다.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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