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 '떠남'만이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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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으로] '떠남'만이 능사는 아니다

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승인 2021-12-13 09:55
  • 신문게재 2021-12-14 18면
  • 김소희 기자김소희 기자
김명주 충남대 교수
김명주 충남대 교수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단편 소설집 『떠남』을 2006년 우연한 기회에 내가 번역 출간한 적이 있다. 번역 당시는 먼로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이었고, 먼로의 다소 밋밋한 서사가 화끈한 서사를 좋아하는 국내 독자들의 구미에 맞지 않은 탓인지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출판사의 요청으로 내가 번역하긴 했지만, 막상 번역을 끝내자 출판사 편집자는 먼로의 어정쩡한 스타일이 영 맘에 걸리는지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뭡니까? 왜 칼라는 남편 클라크를 떠나지 않는 거죠? 클라크는 도무지 매너도 매력도 없는 인간인데요? 페미니즘 소설일거라고 기대했는데 대체 뭡니까?"

편집자는 인형의 집을 기어이 떠나고 마는 입센의 도라처럼 주인공 여성 칼라가 '겉여문' 남편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계가 삐걱거리면 관계를 떠나는 것, 화끈한 관계 단절이 여성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소설의 문법에 맞는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그럴까. 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종종 오래된 친구들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발견한다. 예순 초입 한국 여성으로서 엇비슷한 삶의 굴곡을 지나온 탓이리라. 고등학교 시절 검은 교복의 억압, 영문도 모른 채 역사의 한복판에 섰던 황망한 20대, 결혼과 일의 분주한 균형 속에서 늘 피폐했던 자아, 예순이 넘어 괜한 서운함까지, 비슷한 경험의 공유는 비슷한 얼굴을 생성 해냈음에 틀림없다. 엇비슷한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는 삶을 살면서 친구들은 나의 부분이 되었고, 나 역시 그들의 부분이 되었으리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부분이 되고, 나 역시 그들의 부분이 된다. 그래서 관계를 잃으면, 관계가 차지하던 나의 부분을 상실하는 것이다. 설사 인위적으로 관계를 단절한다 해도 특정 관계가 차지했던 빈자리는 평생 메꿔지지 않는다.

하물며 남편은 오죽할까. 클라크의 존재는 칼라의 삶 속에 이미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혼 삼 년 동안 클라크는 이미 칼라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클라크가 없어지면 그만큼의 칼라가 사라지는 것이다. 함께 하는 시간 내내 칼라와 클라크는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고 만들어왔다. 가까운 누군가와의 화끈한 관계단절은 단박에 나의 상실로 이어지고, 상실은 영원하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여건이 인간의 정신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진리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적·문화적·사회적 구성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몸까지도 그렇게 구성된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 사회적 젠더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섹스조차 사회적 구성물이란 그의 주장은 그래서 말이 된다. 개체 안의 오장육부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생성하듯이, 각 개체 간에도 보이지 않은 자장으로 서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물질적으로 생성된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영향을 주고받고 서로가 서로를 구성해간다.

물론 편집자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적 억압과 착취를 종식하는 정치적 운동이며, 여성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가부장제로 인해 '비존재'였던 여성이 '존재'로서 거듭나는 각성 운동이기에 여성 개체성의 강화와 독립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어떤 경우에나 항상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 개인의 독립과 해방과 더불어 해방된 여성들의 연대도 중시하며, 한발 더 나아가 페미니즘은 아직 각성하지 못한 가족과 이웃과 자연, 즉,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와 연결하고 이들은 포용한다. 이른바 포스트 휴먼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이 누군가를 적대시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반응적일 뿐이다. 먼로는 일찌감치 단절보다 연결을 선택한 포스트 휴먼 페미니스트였다. /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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