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맛있는 빵 피묻은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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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맛있는 빵 피묻은 빵

  • 승인 2022-11-09 09:48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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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 보름달 삼립빵의 보름달 새로나온 보름달 카스테라 보름달~.' 1970년대 중반에 나온 '보름달'은 빵의 신세계였다. 흑백 TV에서 나오는 '보름달' 광고를 보면서 무슨 맛일까 골똘히 상상하곤 했다. 학교에서 무상으로 나눠준 둥근 갈색 빵은 단맛도 없고 뻣뻣했지만 그것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었다. 나는 대전에서 직장에 다니는 엉아(어릴 때 큰언니를 이렇게 불렀다)한테 보름달을 사다 달라고 졸랐다. 추석 때 엉아는 정말로 보름달을 몇 개 사왔다. 나는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빵 봉지를 단숨에 뜯어 입 안이 꽉 차도록 베어 물고 우물우물 먹었다.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천국의 맛이었다. 폭신한 스펀지 같은 빵은 달콤하고 살살 녹았다. '보름달'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빵이 됐다.

빵은 우리에겐 간식이지만 서양에선 주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빵은 유럽, 중동, 남아시아에서 먹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는 인류 최초로 발효 빵을 만들었다. 나일강은 이집트에겐 신의 축복이었다. 이집트인들은 범람하는 나일강의 영양분을 머금은 옥토에 밀을 키웠다. 그들의 수준높은 빵 만드는 기술은 고대 문명의 발판이 됐다. 기원전 3000년 경 이집트에선 빵이 화폐였다. 빵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오죽하면 유대인들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 하면서 빵 반죽을 챙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까.



흔히 우리가 먹는 빵은 달디 달다. 케이크는 물론이고 단팥빵, 크림빵 등 모든 빵들이 당도가 높다. 집에서 빵을 만들어 본 사람들이 들려준 말이 있다. 시중에서 사 먹는 빵처럼 만들려면 설탕을 무지막지하게 넣어야 한다고. 그래서 아무리 빵을 배불리 먹어도 매콤한 김치찌개와 밥이 생각나는 이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양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도 달콤한 줄 알았다. 그런 빵을 삼시세끼 어떻게 먹을까. 알고보니 그들이 먹는 주식용 빵은 아무 맛이 안 나는 거였다. 바게트나 호밀빵처럼 말이다. 밍밍하거나 짠 빵. 거기에 고기나 치즈, 우유 등 여러 가지 곁들여 먹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먹거리는 당대의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았다. 서구사회에서 빵만큼 풍부한 상징성을 지닌 음식은 없다. 빵 소비는 오랫동안 사회 계급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빵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빵에는 세속적이고 불온한, 권력과 뒤얽힌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가난한 장발장은 조카들이 굶게 되자 빵을 훔치다 걸려 감옥에 갇힌다. 팡틴 역시 빵을 위해 몸을 판다. 빵을 먹는 사람과 못 먹는 사람. 이 이분법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가르는 행위였다. 상류층을 위한 부드럽고 흰 빵에서부터 밑바닥 사람들을 위한 여러 가지 곡물을 혼합한 검고 딱딱한 빵 덩어리까지. 빵은 평등하지 않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파리 바게뜨' 가 있다. 알록달록 화려한 빵들이 먹음직스럽다. 이 프랜차이즈 빵집은 한국 어디에나 있다. 성큼 다가온 추위 때문인지 동네 마트엔 삼립호빵이 진열돼 있다. 삼립 단팥빵, 크림빵, 땅콩 샌드 그리고 보름달도 눈에 띈다. 이 모든 빵은 SPC 그룹이라는 제빵업체에서 생산한다. 그런데 얼마 전 평택공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계에 빨려들어가 숨졌다. 그 후 회사의 기가 막힌 만행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결국 성난 시민들은 "피묻은 빵은 먹지 않겠다"며 SPC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다. 보름달 빵 포장지에는 '빵 하나로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삼립빵'이란 글귀가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온기가 아니라 노동자의 비지땀과 피로 물든 빵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애정했던 '보름달'! 직원을 노예로 생각하는 SPC의 빵을 손절하겠다.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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