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선운사도 식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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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선운사도 식후경

  • 승인 2024-10-09 10:10
  • 수정 2024-10-09 15:20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피자
금쪽같은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첫날은 가족과 고창 선운사에 가기로 했다. 언니 친구 아들이 그 곳 카페 피자에 꽂혀 틈만 나면 먹으러 간다고 한다. 우리는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선운사로 달렸다. 드넓은 선운사 주차장엔 차가 가득했다. 아, 축제 첫날이었다. 이런! 우리는 그 카페부터 찾았다. 국도 타고 오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 점심 먹을 때라 배부터 채워야 했다. 2층짜리 카페도 손님이 북적북적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메뉴를 주문했다. 그런데 사장 사촌 같은, 후덕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입은 원피스가 내 옷과 똑같았다. 상체가 몸에 붙는 롱 원피스로 내가 지금 한창 살이 찌는 중인데 20㎏ 정도 더 찌면 저 모습일까. 동지애를 느꼈다. 도원결의라도 맺어야 하나.

목을 빼고 기다려도 피자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주문이 제대로 된 건가? 나는 피자 굽는 곳으로 가서 두리번거렸다. 예의 나의 동지는 곧 나온다고 안심시켰다. 드디어 나왔다. 피자 대(大)자 두 개와 요거트와 커피를 들고 오면서 언니와 나는 속삭였다.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 "셋이서 이걸 못 먹어? 남으면 싸가면 되지 뭐." 오랜만에 먹는 수제 피자의 강한 풍미에 침이 고였다. 따끈한 고르곤졸라를 접어서 입에 넣자 치즈의 진한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나이프와 포크는 장식품일 뿐, 손에 들고 큼지막하게 베어 먹었다. 콤비네이션 피자는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 속 모습처럼 화려했다. 가장자리가 노릇하게 타 바삭바삭한 도우도 일품. 언니의 염려는 기우였다. 태풍이 지나갔나? 피자 두 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말린 과일로 장식한 요거트를 입가심으로 먹고 나자 세상이 달달구리하게 보였다.

선운사는 꽃무릇으로 유명하다. 빨간 꽃무릇이 지천이었다. 모두들 사진찍기에 바빴다. 꽃밭에 들어가 포즈를 잡고 셀카를 찍느라 꽃 대궁이 꺾이고 뭉개졌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을 기대했는데 장터를 방불케 했다. 꽃무릇은 흔히 상사화라고도 한다. 그런데 두 꽃은 종이 다르다고. 꽃무릇은 외래종이란다. 상사화는 우리 꽃으로 봄에 잎이 나오고 시들어 없어진 다음 꽃 대궁이 나온다. 잎과 꽃이 따로 핀다 해서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이루어지는 사랑은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로미와 줄리엣'이 그렇고 양희은은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이라고 노래했다.

고창은 서정주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운사 가까운 곳에 그의 생가가 있다. 상사화는 서정주의 시 '신부'를 떠올리게 한다. '신부'는 첫날 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신랑을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채 앉아 기다리다 재가 된 신부의 이야기다. 어리석은 신랑은 오줌 누러 문을 열고 나가다가 돌쩌귀에 걸린 옷을 신부가 잡아당기는 걸로 오해했다. 그새를 못참고 재촉하는 음탕한 여인이라고. 터무니없는 오해로 신부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 신랑. 억울함과 한으로 재가 된 신부의 원혼. 정절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한국의 전통적 정서가 가득한 시다. 시인은 여인의 정절을 아름답고 비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나. 일생을 권력에 아부한 서정주. 1987년 전두환 생일 기념 축시를 바친 서정주 역시 전두환처럼 일말의 반성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시적 재능은 뛰어났으나 비굴하게 살다간 시인.



대웅전 뒤 동백나무 숲을 보자 가물가물했던 옛 기억이 생각났다. 동백꽃 핀 봄에 온 적이 있었지. 나오는 길에 절 입구 길에서 파는 복분자 주스를 마셨다. 시럽을 넣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맛이었다. 복분자는 정력에 좋아 요강도 엎는다는 속설이 있다. 나는 연애세포가 죽었는지 이제는 남자들이 영 시시해 보인다. 천하의 정우성을 봐도 맨송맨송하다. 복분자를 세 소쿠리 먹으면 설렘이 살아나려나. <지방부장>
피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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