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인칼럼] 연구실로 들어온 휴머노이드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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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인칼럼] 연구실로 들어온 휴머노이드 로봇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 승인 2026-06-14 12:18
  • 신문게재 2026-06-15 18면
  • 박병주 기자박병주 기자
정흥채 대전테크노파크 센터장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최근 글로벌 제약기업 일라이 릴리(Eli Lilly)가 휴머노이드 로봇 '디짓(Digit)'의 생산시설 투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은 단순한 자동화 사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제조업 중심으로 발전해 온 휴머노이드 로봇이 고부가가치 지식산업인 바이오·제약 연구개발(R&D) 영역으로 확장되는 첫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휴머노이드 로봇을 노동력 부족 문제의 해결책으로 바라보지만, 바이오산업에서 그 의미는 훨씬 크다. 핵심은 인력 대체가 아니라 연구 생산성의 혁신에 있다. 현재 신약개발은 평균 10~15년의 개발 기간과 약 20~3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는 대표적인 고위험 산업이다. 성공 확률은 1만 개의 후보물질 중 단 하나 수준에 불과하다. 문제는 연구자들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연구 과정의 상당 부분이 샘플 이동, 시약 분주, 세포 배양, 데이터 기록 등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작업에 소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의 글로벌 연구기관들은 연구자의 실험 시간이 전체 업무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자동화 가능한 단순 반복 작업이라고 분석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의 개입이 많을수록 실험 재현성이 저하된다는 점이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연구자의 70% 이상이 타인의 실험 결과를 재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응답했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을 위해 설계된 기존 실험실 환경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원심분리기, 배양기, 분석장비, 냉장보관고 등 다양한 설비를 별도의 구조 변경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는 바이오산업의 패러다임을 '자동화'에서 '자율화'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미 세계 주요 연구기관들은 AI와 로봇을 결합한 '자율 연구실(Self-driving Lab)'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가 실험 설계를 수행하고, 로봇이 실험을 실행하며, 결과 데이터를 다시 AI가 학습하는 순환 구조다. 특히 생성형 AI의 발전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AI가 새로운 단백질 구조를 설계하면 로봇이 즉시 실험을 수행하고 결과를 검증하는 방식이 가능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연구원 수십 명이 수개월 동안 진행해야 했던 탐색 실험이 며칠 내에 완료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의미는 명확하다. 현재 글로벌 제약산업은 연구개발 생산성 저하라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개발 비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신약 승인 건수 증가율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과 AI 기반 연구 자동화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연구 생산성이 20~30%만 향상되어도 신약 개발 기간 단축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수천억 원 규모에 달할 수 있다. 실제 제약 자동화 프로젝트들의 투자 회수 기간은 일반적으로 1~3년 수준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세포치료제 제조 분야에서는 70% 이상의 비용 절감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존재한다. GMP(우수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 클린룸 환경에서의 멸균 적합성, 실험실 장비 간 데이터 표준화, 인간 수준의 손재주(Hand Dexterity) 확보는 아직 기술적으로 완전한 해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특히 바이오 실험은 마이크로리터 단위의 액체를 다루기 때문에 제조업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정밀성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은 분명하다. 과거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력을 기계로 대체했다면,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은 이제 인간의 실험 수행 능력을 증강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앞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와 기업은 더 많은 연구자를 보유한 곳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율 연구 시스템'을 보유한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바이오 연구실에 들어오는 순간은 단순한 자동화의 시작이 아니다. 그것은 신약개발의 경제학 자체가 바뀌는 출발점이며, 바이오산업의 다음 성장 곡선을 결정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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