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새롬의 세상만사] 살색과 살구색

  • 오피니언
  • 기자수첩

[박새롬의 세상만사] 살색과 살구색

  • 승인 2018-05-13 10:19
  • 수정 2018-05-13 10:26
  • 신문게재 2018-05-14 21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1990년대 크레파스에는 주황과 노랑의 중간으로 조금 연한 톤의, 살색이라고 인쇄된 종이가 둘러진 색깔이 있었다. 교실이나 야외에서 크레파스를 나눠쓰던 아이들은 사람을 색칠할 때 어김없이 "나 살색 크레파스 줘"라고 말했다. 가끔 갈색을 섞어 어두운 피부색을 표현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색깔의 이름은 너무 익숙한 '살색'이었다.

초등학생이던 당시 갖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는 '벙어리 장갑'이었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을 동그란 주머니에 넣고 걸으면 어쩐지 귀여운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왜 이름이 벙어리 장갑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들만 그렇게 말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어른들은 베이지색 속옷이나 스타킹을 살 때 살색이라 부르는 일이 많았고, 말없는 사람에게 꿀먹은 벙어리라는 말을 쉽게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무심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무심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금을 다행스러운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살색이 이름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2002년 국가인권위는 '살색이라는 색명은 황인종이 아닌 인종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발표한 뒤 기술표준원에 한국산업규격(KS)을 개정토록 권고했다. 2005년에는 크레파스 등에서 살색 대신 살구색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피부 톤을 표현할 수 있을만한 여러 색의 크레파스를 모아놓고 '모두 살색입니다' 라고 쓴 공익광고 포스터도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인종을 만나게 되면서 사람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걸 모두가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살색이 크레파스 속에서 사라져서 기뻤다.

언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썼던 '벙어리 장갑'도 2014년 무렵 '손모아장갑'이라는 새 이름을 만났다. 아직 살구색처럼 완전히 자리 잡지는 못했다. 엄지만 나와 있으니 '엄지장갑'이라고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 뭐라 부른대도 좋다. 비하적인 표현 없이 순수하게 손을 덥혀 줄, 이전보다 훨씬 따뜻한 장갑이 될 것이다.

두 단어가 사라져 가는 현실은, 아이들이 차별적인 단어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직 불안하다. 살색, 벙어리장갑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맘충, 한남충, 김여사 등 한 집단을 일반화하고 공격하는 표현은 지금도 계속 사용되고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자극적인 단어를 빨리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이 단어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할 것이다.

쓰지 않아야 할 단어들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사라질까. 그래도 혐오표현으로 인식이라도 되는 단어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지금 이 글에도 미처 몰랐던 무심한 차별어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혹시 누군가 발견했다면 제발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바꾸자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성추행 유죄받은 송활섭 대전시의원 제명 촉구에 의회 "판단 후 결정"
  2. 천안 A대기업서 질소가스 누출로 3명 부상
  3. "시설 아동에 안전하고 쾌적한 체육시설 제공"
  4. 김민숙, 뇌병변장애인 맞춤 지원정책 모색… "정책 실현 적극 뒷받침"
  5. 천안김안과 천안역본점, 운동선수 등을 위한 '새빛' 선사
  1. 회덕농협-NH누리봉사단, 포도농가 일손 돕기 나서
  2.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3. ‘몸짱을 위해’
  4. 내년 최저임금 1만320원 지역 노사 엇갈린 반응… 노동계 "실망·우려" vs 경영계 "절충·수용"
  5. 세종시 싱싱장터 납품업체 위생 상태 '양호'

헤드라인 뉴스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가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추진하면서 국론분열을 자초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집권 초 미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위협 등 매크로 경제 불확실성 속 민생과 경제 회생을 위해 국민 통합이 중차대한 시기임에도 되려 갈등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론화 절차 없이 해수부 탈(脫) 세종만 서두를 뿐 특별법 또는 개헌 등 행정수도 완성 구체적 로드맵 발표는 없어 충청 지역민의 박탈감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부는 10일 이전 청사로 부산시 동구 소재 IM빌딩과 협성타워 두 곳을 임차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건물 모두..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2012년 세종시 출범 전·후 '행정구역은 세종시, 소유권은 충남도'에 있는 애매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7월 폐원한 금강수목원. 그동안 중앙정부와 세종시, 충남도 모두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사실상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한 탓이다. 국·시비 매칭 방식으로 중부권 최대 산림자원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 수 있었으나 그 기회를 모두 놓쳤다.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인접한 입지의 금남면인 만큼, 금강수목원 주변을 신도시로 편입해 '행복도시 특별회계'로 새로운 미래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다. 무소속 김종민 국회의원(산자중기위, 세종 갑)은 7..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전국 부동산신탁사 부실 문제가 시한폭탄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토지신탁 계약 체결을 조건으로 뒷돈을 받은 부동산신탁회사 법인의 임직원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대전지검 형사4부는 모 부동산신탁 대전지점 차장 A(38)씨와 대전지점장 B(44)씨 그리고 대전지점 과장 C(34)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수재등)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11일 밝혔다. 또 시행사 대표 D(60)씨를 특경법위반(증재등)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A씨 등 부동산 신탁사 대전지점 차장으로 지내던 2020년 11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시행..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몸짱을 위해’ ‘몸짱을 위해’

  •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 ‘시원하게 장 보세요’ ‘시원하게 장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