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노년의 삶의 무늬, 스승 오인환 <한성 경성 서울을 누비다>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노년의 삶의 무늬, 스승 오인환 <한성 경성 서울을 누비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22-10-31 08:23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이승선 교수
이승선 교수
백년설은 여러 노래를 불렀다. <번지 없는 주막>과 <나그네 설움>이 특히 유명하다. <번지 없는 주막>은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으로 읊조려진다. 백두산 어귀의 주점으로 추정한다. <나그네 설움>의 1절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운을 뗀다. 2절의 시작은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가워라'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청년들이 정처마저 잃고 하염없이 헤매며 거리를 거닐었다. 경찰에 붙들려 간 백년설이 치도곤을 당하고 석방된 어느 날 저녁, 어떤 대폿집. 조경환이 가사를 짓고 이재호가 곡을 붙인 노래를 백년설이 불렀다. 비록 그날의 그 대폿집 문패와 번지수를 알 길은 없으나 '이국보다 차가웠던 낯익은 거리'는 조선총독부가 삼켜버린 경성의 종로경찰서 앞길이었다. 나그네들이 헤매던 거리가 '종로경찰서 앞'이라는 구체적 기록으로 드러나면서, 노랫말의 서사에 피와 살이 붙고, 노래가 생명을 얻었다.

언론인과 언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독립신문>은 익히 알려진 언론매체다. 1896년 서재필 등이 발행한 <독립신문>과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신문은 창간호에서 정치적으로 편벽되지 않을 것이며 공평하게 보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정부와 백성 간의 소통을 도모하겠다고 천명했다. 또 상하귀천과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 띄어쓰기를 했다. 독립신문은 논설에서 '바른대로'만 취재하고 보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면 보도할 것이요, 탐관오리의 행적을 낱낱이 파헤칠 것이며, 사사로운 여염집 백성이라도 무법한 자는 찾아내 보도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인민을 위해 신문을 발행하겠노라고 말했다.



독립신문은 논설보다 '광고'를 상단에 편집했다. 독자들의 불만 접수와 투고를 환영하며 부산과 원산 인천 등지에 분국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렸다. 거리에서 신문을 판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열부 중에 두 부, 백부 중에 이십 부를 덤으로 끼워준다는 판매정보도 실었다. 더 중요한 정보를 제시했다. 신문구독료였다. 한 장에 동전 한 푼을 받았다. 구독료는 월 십이 전이며 연간 일원 삼십 전이었다. 정기구독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정동 신문사'로 와서 돈을 미리 내고 성명과 주소를 적어 놓고 가라고 안내했다. 독립신문을 구독하고 싶은 백성들은 서울 정동의 어디로 찾아가야 했을까, 신문사는 구체적으로 그 거리의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그 마땅한 질문을 당연한 것으로 질문하지 못했다.

정년퇴임을 바로 앞에 둔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묻혀질 뻔한 이 질문을 했다. 2000년 가을 마지막 학기 어느 날, 오인환 교수는 제자들과 차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우연한 호기심인 것처럼, 독립신문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던졌다. 스승은 스스로 놀랐다. 통신사 기자로 10년, 언론학 교수로 사반세기, 언론학 분야에서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스승은 한국 언론이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해 온 독립신문의 사옥 터가 어디였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스승은 정년퇴임 후 22년간, 한국 언론의 자취를 찾아 서울의 거리를 구석구석 누볐다. 2008년 <100년 전 한성을 누비다>, 2018년 <일제 강점기 경성을 누비다> 그리고 올해 <해방공간 서울을 누비다>를 펴냈다. 책에는 신문사들의 창간호와 신문사 사옥의 위치 정보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스승은 이 책들을 우리나라 앞날의 갈림길에서 역투한 대선배 언론인들에게 바친다고 쓰셨다. 스승은 1935년생, 우리 나이로 아흔이다. 학자로서 노년의 삶이 얼마나 치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신다. 1883년 한성에서 발행된 <한성순보>를 기준으로 하자면, 한국 신문 140년사에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스승이 일궈냈다. 오로지 당신의 발품을 팔아서 이룬 성과다.

사람의 생각과 삶에는 무늬가 있다. 그 사람의 생애 전부가 담긴 무늬다. 스승은 '우연한 기회에 문득' 던진 질문이라고 자세를 낮추셨으나, 우리는 그의 생애가 전부 담긴 매우 당연한 스승의 '질문'이라고 해석한다. 정년퇴임 전 스승의 삶이 그러하셨다. 퇴임 후에 스승께서는 역시 행동으로 여전히 같은 답을 보여주셨다. 정년 후 사반세기의 생애를 바쳐 한성과 경성과 서울을 누비고 '언론지리지'(言論地理誌) 세 권을 펴낸 스승의 노년은 아름답다. 스승의 그윽한 삶의 무늬에 머리 숙인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천안시, 읍면동 행복키움지원단 활동보고회 개최
  2. 천안법원, 편도 2차로 보행자 충격해 사망케 한 20대 남성 금고형
  3. ㈜거산케미칼, 천안지역 이웃돕기 성금 1000만원 후원
  4. 천안시의회 도심하천특별위원회, 활동경과보고서 최종 채택하며 활동 마무리
  5. ㈜지비스타일, 천안지역 취약계층 위해 내의 2000벌 기탁
  1. SGI서울보증 천안지점, 천안시에 사회복지시설 지원금 300만원 전달
  2. 천안의료원, 보건복지부 운영평가서 전반적 개선
  3. 재주식품, 천안지역 취약계층 위해 후원 물품 전달
  4. 한기대 온평원, '스텝 서비스 모니터링단' 해단식
  5. 백석대 서건우 교수·정다솔 학생, 충남 장애인 체육 표창 동시 수상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통합 추진 동력 확보... 남은 과제도 산적

대전충남통합 추진 동력 확보... 남은 과제도 산적

대전·충남행정통합이 이재명 대통령의 긍정 발언으로 추진 동력을 확보한 가운데 공론화 등 과제 해결이 우선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5일 충남 천안시에 위치한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대전·충남 행정통합에 사실상 힘을 실었다. 이 대통령은 "근본적으로는 수도권 일극 체제를 해소하는 지역균형발전이 필요하다"면서 충청권의 광역 협력 구조를 '5극 3특 체제' 구상과 연계하며 행정통합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대전·충남의 행정통합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으로 현재 국회에 제출돼 소관위원회에 회부된..

충청 여야, 내년 지방선거 앞 `주도권` 선점 경쟁 치열
충청 여야, 내년 지방선거 앞 '주도권' 선점 경쟁 치열

내년 지방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격전지인 충청을 잡으려는 여야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전·충청지역의 미래 어젠다 발굴과 대시민 여론전 등 내년 지선을 겨냥한 여야 정치권의 행보가 빨라지는 가운데 역대 선거마다 승자를 결정지었던 '금강벨트'의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 주목된다. 여야 정치권에게 내년 6월 3일 치르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 이후 1년 만에 치르는 첫 전국 단위 선거로서, 향후 국정 운영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때문에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권 안정..

2026년 R&D 예산 확정… 과기연구노조 "연구개발 생태계 복원 마중물 되길"
2026년 R&D 예산 확정… 과기연구노조 "연구개발 생태계 복원 마중물 되길"

윤석열 정부가 무자비하게 삭감했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2026년 드디어 정상화된다. 예산 삭감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연구 현장은 회복된 예산이 연구개발 생태계 복원에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철저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국회는 이달 2일 본회의 의결을 통해 2026년도 예산안을 최종 확정했다. 정부 총 R&D 예산은 2025년 29조 6000억 원보다 19.9%, 5조 9000억 원 늘어난 35조 5000억 원이다. 정부 총지출 대비 4.9%가량을 차지하는 액수다. 윤석열 정부의 R&D 삭감 파동으로 2024년..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

  • ‘추울 땐 족욕이 딱’ ‘추울 땐 족욕이 딱’

  •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