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3월을 만나다

  • 오피니언
  • 세상속으로

[세상속으로]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3월을 만나다

김재석 소설가

  • 승인 2023-03-27 11:07
  • 신문게재 2023-03-28 18면
  • 김소희 기자김소희 기자
김재석 소설가
"치허문(致虛門), 텅 빈 문을 열고 들어가/ 내 안의 숲길 사유, 원(思惟園)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3월의 정원과 마주했다."

지난 3월 셋째 주 주말, 귀농귀촌한 지인에게서 지방 구석에 이런 곳도 있다며 소개를 받고 경북 군위에 있는 사설 수목원인 사유원(思惟園)을 방문했다.

텅 빈 상태를 뜻하는 치허문(致虛門) 입구 안쪽에 주차를 하고, 안내 데스크에게 GPS 위치추적기를 선물(?)받았다. 뭐냐고 되물었다. 직원은 농담조로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원하는 선물이라며 나가실 때 반납하라며 생수도 한 병 챙겨주었다. 가끔 퇴장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분들이 있어서 꼭 목에 차고 있어달란다. 10만평에 가까운 식물원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조난까지 당할까 싶었다.

좀 가파르다 싶은 비나리길을 걸어 오른쪽으로 꺾으면 치하루길로 접어든다. 울창한 리기다소나무숲길을 따라 가다 소요헌을 만났다. '자유롭게 거닐며 다니는 집'이란 뜻의 소요헌은 장자의 소요유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긴 상자각 같은 구조물 두 개를 좁은 V 형태로 연결했을 뿐 어떤 기능도, 장식도 없었다. 다만 이 공간에 대한 에피소드만큼은 유명했다. '건축의 시인'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출신 세계적 건축가인 알바로 시자의 건축 예술품이다. 원래 스페인 마드리드 현상공모에 설계가 당선되어 피카소 뮤지엄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거기에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스페인 게르니카 지역의 대학살을 그린 작품-가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작품 유치가 어려워 계획이 전면 취소되었다. 사유원의 설립자인 대구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곳에 건물을 유치하고, 마치 게르니카 비극 내지 그림을 연상케 하는 철골 조각품을 건물 천장을 뚫어 매달아 놓았다. 나는 햇빛이 파고드는 밑바닥에서 조각품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에 관광객도 없어 나는 유튜브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찾아 볼륨을 높였다. 건물 내벽을 타고 스테레오 음향으로 사유의 깊이가 횡적으로 퍼져나갔다. 종횡으로 퍼져가는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며 한참을 거닐었다. 이 게르니카 장식품의 뒤쪽 방엔 전망대와 함께 대리석의 새알이 조각되어 있다. 비극과 재탄생의 양면성이라고 해야 할까.



소유헌을 나와 더 위쪽으로 발길을 향하면 풍설기천년이 나온다. '바람, 눈, 비를 맞으며 어언 천년'이란 뜻으로 오랜 풍상을 이겨낸 수령 300년 이상 된 모과나무 108그루를 모아놓은 정원이다. 설립자 유 회장이 일본으로 밀반출될 위기의 모과나무 4그루를 웃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모은 모과나무를 심을 곳을 찾다 이곳에 사유원을 지었다고 한다. 한학자이기도 한 유 회장이 지은 이름 하나하나가 공간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더했다. 그 옆에 별유동원-인간세상이 아닌 무릉도원-은 수령 200년 이상의 백일홍 나무(배롱나무)가 모여 있다. 초여름 백일홍이 피면 이 일대가 장관이 된다고 한다. 여름을 당겨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미리내길 언덕을 넘어가 느티나무 숲길인 한휴시경과 사담 레스토랑, 유담이란 한옥 정원을 거쳐 정상부근인 가가빈빈(브런치 카페)까지, 산책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다양한 수목을 만났다. 개나리와 진달래꽃은 지천에 널려있고, 특히 겨울에 핀다는 매화꽃은 이미 진줄 알았는데 길목마다 그 붉은 탐스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능수 벚꽃이 만개해 꽃잎을 늘어뜨리고, 흰 목련과 붉은 목련이 나란히 만개해 있었다. 그 어디에서 이런 3월의 꽃들을 한자리에서 볼까 싶었다. 정말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무릉도원 같은 사유원 산책 숲길에서 단 하나의 3월의 정원을 만났다. 이곳을 식물원이라고 명하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승효상 건축가의 건축물부터 알바로 시자의 건축 작품까지 건축물을 연결하는 숲길에 조성된 정원은 그저 둘러보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사유하는 신개념의 정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왜 퇴장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지방소멸을 말하는 요즘, 군위에 이런 사유의 민간정원이 세워졌다는 사실에 놀라고, 소멸을 말하기에 앞서 새로움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지방의 자세에 대해 사유가 깊어졌다.
김재석 소설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응원하다 쓰러져도 행복합니다. 한화가 반드시 한국시리즈 가야 하는 이유
  2. "대전 컨택센터 상담사님들, 올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3.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4. 유성구장애인종합복지관, 여성 장애인들 대상 가을 나들이
  5. 김태흠 충남도지사, 일본 오사카서 충남 세일즈 활동
  1. "행정당국 절차 위법" vs "품질, 안전 이상없어"
  2. ‘자랑스런 우리 땅 독도에 대해 공부해요’
  3. 박경호 "내년 지선, 앞장서 뛸 것"… 국민의힘 대전시당위원장 도전장
  4. 올 김장철, 배추 등 농수산물 수급 '안정적'
  5. [2025 국감] 대전국세청 가업승계 제도 실효성 높여야

헤드라인 뉴스


대전시 국감서 `0시 축제` 예산 둘러싸고 격돌

대전시 국감서 '0시 축제' 예산 둘러싸고 격돌

2년 연속 200만 명이 다녀간 대전시 '0시 축제' 운영 재정을 둘러싸고 여당 의원과 보수야당 소속인 이장우 대전시장이 24일 뜨겁게 격돌했다. 이날 대전시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대전시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선 민간 기부금까지 동원 우회 재정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맞서 국민의힘 광역단체장인 이 시장은 자발적 기부일 뿐 강요는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여당 주장에 대해 정면 반박했다. 민주당 한병도 의원(익산을)에 따르면 3년간 0시 축제에 투입된 시비만 124억 7000만 원, 외부 협찬 및 기부금까지 포함..

[갤럽] 충청권 정당 지지도… `더불어민주당 51%, 국민의힘 29%`
[갤럽] 충청권 정당 지지도… '더불어민주당 51%, 국민의힘 29%'

충청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힘을 앞서는 여론조사 결과가 24일 나왔다. 한국갤럽이 21~23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정당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대전·세종·충청에서 더불어민주당은 51%, 국민의힘은 29%를 기록했다. 이어 개혁신당 4%, 조국혁신당 2%, 진보당 1%로 나타났다. 무당층은 14%에 달했다. 전국 평균으론 더불어민주당 43%, 국민의힘 25%, 조국혁신당 3%, 개혁신당 2%, 진보당 1%, 기본소득당 0.2%, 사회민주당 0.1%, 무당층 25%로 조사됐다. 충청권에서 이재명 대통령 직무수..

[기획] `가을 정취 물씬` 자연이 살아 숨쉬는 충남의 생태명소
[기획] '가을 정취 물씬' 자연이 살아 숨쉬는 충남의 생태명소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충남도의 명산과 습지가 지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힐링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청양 칠갑산을 비롯해 예산 덕산, 공주 계룡산, 논산 대둔산, 금산 천내습지까지 각 지역은 저마다의 자연환경과 생태적 특성을 간직하며 도민과 관광객에게 쉼과 배움의 공간을 제공한다. 가을빛으로 물든 충남의 생태명소를 알아본다.<편집자 주> ▲청양 칠갑산= 해발 561m 높이의 칠갑산은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을 지닌 명산으로 자연 그대로의 울창한 숲을 지니고 있다. 칠갑산 가을 단풍은 백미로 손꼽는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시 국감…내란 옹호 놓고 치열한 공방 대전시 국감…내란 옹호 놓고 치열한 공방

  •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 ‘자랑스런 우리 땅 독도에 대해 공부해요’ ‘자랑스런 우리 땅 독도에 대해 공부해요’

  • 상서 하이패스 IC 23일 오후 2시 개통 상서 하이패스 IC 23일 오후 2시 개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