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성범죄 수사와 재판, 이제는 달라져야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성범죄 수사와 재판, 이제는 달라져야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 승인 2024-01-29 10:11
  • 신문게재 2024-01-30 18면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캡처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향후 성범죄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판결이 선고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2024. 1. 4. 선고 2023도13081 사건으로, 혹시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판례 전문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판결은 최근 한 언론사에서 '성범죄 판결, 대법원이 제동'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른바 '성인지 감수성' 판례로 알려진 기존 대법원의 판례를 직접 반박하는 대법원 판례가 선고되었다는 것이다.



기존 판례를 반박했다는 해석은 사실 옳지 못하다. 다만 이 판결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성범죄 사건에서 암암리에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여 피고인에게 무죄의 입증책임을 부담시켜왔던 수사와 재판 관행을 정면으로 지적하며 경종을 울렸다는 것에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1심, 2심 재판의 유죄 선고 이유에 '피고인이 제출한 증거는 무죄를 입증하기에 부족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검사가 유죄의 입증책임을 부담하고 있는데도 실질적으로 피고인에게 입증책임을 전가해 왔음이 버젓이 판결문에 드러났던 것이다.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2018년 선고된 이른바 '성인지 감수성' 판결이 그 단초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해당 판결이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라는 의미로 씌여진 것은 전혀 아니다. 그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판결이며 필요성 또한 분명했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쉽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해 '성범죄 피해자라면 곧바로 신고하였을 것, 성범죄 피해를 당했는데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등의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그에 어긋난 행동을 트집 잡아 신빙성을 판단하던 관행에 제동을 걸었던 중요하고 획기적인 판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성이라는 문학적 단어의 사용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명확하지 못하다 보니 현장에서는 이를 단순화하기 시작했다.

'피해자 진술은 일관되기만 하면 일단 믿어서 유죄로 보고, 다른 증거가 있으면 무죄로 판단하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싹트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사법 현장의 편리함이다. 이렇게 편한 수사가 있을 수 없다. 피해자 진술로서 증거는 이미 확보했으니 피의자에게 반대되는 증거를 가져와 보라고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경찰은 느긋하게 꼼짝도 않는 반면, 피의자가 CCTV를 구하지 못해 안달복달하고 지워진 문자메시지를 복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일이 당연한 일처럼 돼버렸다. 게다가 그런 방식의 잘못이 지적되기는커녕 법원에서도 쉽게 유죄가 선고되는데 유죄추정의 원칙이 자리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는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언급하며 "이는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하여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오죽하면 이토록 당연한 내용을 굳이 언급해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

혹자는 이번 판결을 남녀갈등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여성 대법관이 퇴임하자 발생한 일이라거나, 향후 피해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악용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 판결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하고 그것이 형사법의 근간인 무죄 추정의 원칙을 배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를 명확히 한 것에 가깝다.

피의자에게 무죄의 입증책임을 부담시키는 현재의 공공연한 실태는 사법 현장에는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어서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물론 성인지 감수성 판결 이전 과거로의 회귀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판결은 피해자와 피의자 또는 남녀의 대립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수사기관을 향해서는 그들에게 부여된 증거주의에 입각한 입증책임을, 법원을 향해서는 헌법적 원칙을 준수할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점을 되새겼으면 한다.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천안시, 읍면동 행복키움지원단 활동보고회 개최
  2. 천안법원, 편도 2차로 보행자 충격해 사망케 한 20대 남성 금고형
  3. ㈜거산케미칼, 천안지역 이웃돕기 성금 1000만원 후원
  4. 천안시의회 도심하천특별위원회, 활동경과보고서 최종 채택하며 활동 마무리
  5. 행복청, 2026년 4월 중앙동 전진 배치...행정수도청 시동
  1. ㈜지비스타일, 천안지역 취약계층 위해 내의 2000벌 기탁
  2. SGI서울보증 천안지점, 천안시에 사회복지시설 지원금 300만원 전달
  3. 천안의료원, 보건복지부 운영평가서 전반적 개선
  4. 한기대 온평원, '스텝 서비스 모니터링단' 해단식
  5. 재주식품, 천안지역 취약계층 위해 후원 물품 전달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탄력받나… 李대통령 "모범적 통합" 언급

대전·충남 행정통합 탄력받나… 李대통령 "모범적 통합" 언급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전·충남 행정통합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면서다. 김태흠 충남지사와 이장우 대전시장은 이 대통령의 긍정적 반응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며 행정통합 법안 처리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5일 충남 천안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첨단산업의 심장, 충남의 미래를 설계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5극 3특' 체제를 거론하며 "지역 연합이 나름대로 조금씩 진척되는 것 같다"면서도 "협의하고 협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규모로 통합하는 게 좋다고 생..

충남도, 당진에 2조 원 규모 `AI데이터센터` 유치
충남도, 당진에 2조 원 규모 'AI데이터센터' 유치

충남도가 2조 원 규모 AI데이터센터를 유치했다. 김태흠 지사는 4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오성환 당진시장, 안병철 지엔씨에너지 대표이사, 정영훈 디씨코리아 대표이사와 당진 AI데이터센터 건립을 위한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르면, 지엔씨에너지는 당진 석문국가산업단지 내 3만 3673㎡(1만 평) 부지에 건축연면적 7만 2885㎡ 규모로 AI데이터센터를 건립한다. 이를 위해 지엔씨에너지는 디씨코리아 등과 특수목적법인(SPC)을 구성하고, 2031년까지 2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지엔씨에너지는 이와 함께 200여 명의 신규 고용..

11월 전국 민간아파트 평당 분양가 2797만 원 달해
11월 전국 민간아파트 평당 분양가 2797만 원 달해

전국 민간아파트 ㎡당 평균 분양가가 사상 처음으로 800만원을 넘어섰다. 평당(3.3㎡) 분양가로 환산하면 2797만 원에 달했다. 5일 리얼하우스가 청약홈 자료를 분석한 결과, 11월 전국 민간아파트 ㎡당 평균 분양가격은 827만 원이다.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 최고치로 1년 새 6.85% 올랐다. 전국 ㎡ 당 분양가는 지난 2021년 530만 원에서 2023년 660만 원으로 오른 데 이어 2024년에는 750만 원까지 치솟았다. 올해 들어 상승 흐름은 더 빨라져 9월 778만 원, 10월 798만 원, 11월 827만 원으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

  • ‘추울 땐 족욕이 딱’ ‘추울 땐 족욕이 딱’

  •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