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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육군32사단 참전유공자 초청 행사에서 월남전 참전용사 이종세 옹을 만났다. 소대를 이끈 전투에서 승리해 1966년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했다. |
월남전 참전용사 이종세(87·대전 중구) 옹은 기자 물음에 기억의 책장을 50페이지 뒤로 넘겼다. 당시 맹호부대 기갑연대 소속 중사였던 그는 전쟁 중 목숨을 잃거나 다친 지휘관 대신 부대원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고, 승리한 공을 인정받아 1966년 최고등급인 태극 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이 옹은 "전우들이 믿고 따라줘 가능했다"라며 담담히 말했지만 중대장의 갑작스러운 죽음, 200여 명의 목숨을 맡았던 순간은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오랜 전투에 소속 부대 6분 1이 사망했고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의 코에 있는 상처도 포탄 파편에 맞은 흔적이다.
13일 육군 제32보병사단이 개최한 참전유공자 초청행사에서 만난 이 옹은 참전 영웅들을 위해 동요 공연을 준비한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19살에 입대해 21살 베트남전에 나갔던 그는 어느새 7살 증손주를 둔 할아버지다. 이 옹은 "6.25 전쟁을 치른 선배님들이 생각나고, 나도 월남전에 참전했던 기억이 생생하니 눈물이 났다"라며 "집안에서 2대 독자라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됐지만, 남자라면 당연히 나라를 위해 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 부모 몰래 도장까지 찍어 지원했었다"라며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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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육군32보병사단에서 개최한 광복 80주년, 호국보훈의 달 기념 참전유공자 초청 행사 모습. |
6.25 전쟁 당시 고향인 제주에서 학도병으로 징집돼 1950년 대전 전투에 참전했던 김태수(95·대전 서구)옹도 "목숨을 걸고 나라를 살리려는 마음이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최전선 방어가 뚫리면서 북한군의 남진으로 열세에 몰린 상황인데도, 20살 청년은 애국심 하나로 전쟁터에 나갔다. 대전 전투 당시 치열한 전쟁통에 역전은 불에 타 폐허로 변했고, 지리산으로 후퇴하는 북한군을 정신없이 쫓았다. 김 옹은 "제주도에서 학도병 80명이 올라와 경북 영천에서부터 진격해서 대전까지 온 것"이라며 "지리산 전투 후 평양까지 들어갔었는데, 중공군이 나오는 바람에 후퇴했다"라고 말했다. 북한군에 의해 타고 있던 차가 뒤집혀 그가 논에 빠지고 전우도 부상을 당해 죽을 고비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는 "당시 북한군이 총을 겨누고 주변을 탐색할 때 발각돼 이제 죽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나를 못 보고 지나쳐 간신히 살았다"라며 긴박했던 순간을 설명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전장에 나섰지만, 정작 그는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다만, 그에게는 나라를 지킨 명예로운 훈장이 항상 가슴 속에 박혀있다. 김 옹은 "교복을 입고 싸웠던 시절이 생각 나서 먹먹한 하루였다"라며 "나라를 위해서는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한다. 자기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나라를 위해 희생한다는 각오를 갖는 것이 바른 군인의 자세"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정바름 기자 niya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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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육군32보병사단에서 개최한 참전유공자 초청행사에 참석한 김태수 옹.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대전 전투를 치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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