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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충남농업기술원장 |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소중한 쌀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넉넉히 얻기 위해 '올벼'라는 조생종 벼를 재배했다. 추수 전에 일찍 익는 벼를 베어 밥을 짓거나, 제사상에 올리거나, 흉년과 기근에 대비해 올벼를 심었던 것이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중부지방에서는 5월 초에 심어 8월 말에서 9월 초에 수확한다. 벼의 이삭의 80~85%가 익었을 때 수확해 가마솥에 찌고 말려 도정한 올벼는 일반 쌀보다 알이 단단하고 완전미율이 높으며, 찌는 과정에서 쌀겨 영양소가 쌀알 속으로 스며들어 건강식으로도 각광받았다. 올벼 첫 수확은 한 해 풍요를 기원하는 농촌의 큰 행사였고, 올벼는 단순한 조기 수확 작물을 넘어 농업인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빠른 수확과 풍요를 바랐던 옛 농부들의 지혜는 오늘날 첨단 농업기술과 만나 새로운 혁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육종 기술의 발전으로 '빠르미'와 '2세대 빠르미' 같은 초조생종 벼 품종이 개발된 것이다. 충남농업기술원이 2018년 개발한 빠르미는 이름 그대로 '빠르게 여무는 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벼는 생육 기간이 130일이지만 빠르미는 약 80여 일로 매우 짧아 봄에 심으면 여름에, 여름에 심으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다. 따라서 장마와 태풍을 피해 수확할 수 있고, 원예작물과 이모작·삼모작도 가능해 시설하우스에서 수박, 빠르미, 오이까지 연달아 재배하는 삼모작 성공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빠르미 장점은 빠른 수확 시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후속 품종인 '2세대 빠르미'는 누룽지 향이 나는 '빠르미 향'과 '빠르미2'를 포괄하는 이름으로, 기존 빠르미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밥맛과 재배 안정성을 한층 높였다. 아밀로스 함량이 11.6%로 낮아 밥이 찰지고 맛이 뛰어나며, 도열병에 강하다. 또한 생육 기간이 짧아 농업용수 사용량을 50% 이상, 질소비료 사용량은 10% 이상 줄일 수 있어 생산비와 농약 사용을 절감하고, 친환경 농업 실현에도 크게 기여한다. 7월 하순이면 수확이 가능해 기존 조생종보다 한 달 이상 빠른 햅쌀 출하가 가능하다.
2세대 빠르미의 친환경 가치와 기후위기 대응 효과는 환경부에서도 인정받았다. 2024년 전국 8,655개 사례 중 단 4건 선정된 '기후위기 적응 대책 지자체 우수사례'에 2세대 빠르미가 포함된 것이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온난화 지수가 28배나 높아 농업 분야 온실가스 감축이 시급한데, 2세대 빠르미는 생육 기간 단축과 물 절약을 통해 메탄 발생을 36% 이상 줄이는 효과가 입증됐다.
2세대 빠르미가 이끄는 한국 쌀 농업의 미래는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속담처럼, 부지런함이 곧 생존이었다. 이제는 빠르미와 같은 혁신 품종 덕분에 일반 벼보다 한 달 일찍 수확해도 겨울 내내 든든한 쌀밥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예로부터 '쌀독에서 인심난다',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쌀이 넉넉해야 마음의 여유와 따뜻한 정이 생기고, 든든한 밥 한 끼가 건강의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2세대 빠르미와 같은 혁신 품종은 농업인의 땀과 정성이 더해질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쌀독에서 인심이 넘치고, 건강한 밥상이 이어질 때 우리 사회도 더욱 따뜻해진다. 올해도 2세대 빠르미와 함께 풍요와 희망이 무르익기를 기대한다./김영 충남농업기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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