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특징은 늘 정착민과 접촉, 적대적이지만 상호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목민에겐 정착민들의 생활용품 및 사치품 필요하고, 정착민에겐 유목민의 생산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역, 대상(隊商), 약탈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정착민의 세력이 약해지면 확장하였다가 정착민에게 동화되어 또 다시 소멸한다. 이어지는 유목민끼리의 부단한 싸움과 분열이 일어나 흥망성쇠가 반복된다.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하다. 너나없이 무언가 상상해야 한다. 칭기즈칸의 인식 또한 다르지 않았다. 부족 통합이 절실하고, 정착민의 쇠퇴에 대한 상황인식으로 정복자의 길에 나선다.
칭기즈칸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다. 현재 몽골이 기념하는 탄생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 9세 때 아버지가 독살 당해, 극도로 가난하여 초근목피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1189년 카마그 몽골의 칸이 되었으며, 부족을 하나하나 통합 1206년 몽골제국의 칸으로 즉위한다. 이 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탁월한 인사정책, 타 부족의 존중과 포용, 균등한 분배, 헌신과 책임감을 불러온 상하 없는 자유 토론문화, 법치확보, 최고 권력자를 법아래 두는 칸의 선출 등이다. 간결하게 표현하였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현대 지도자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핵심 덕목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자무식인 사람이, 이러한 정책을 자신의 직관과 경험에 의존, 상상력과 비전만으로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나아가, 타국의 통치체계와 법제도를 검토하여 자신의 제국에 반영하기도 한다. 제국 전체의 통치를 위해 문자 체계를 도입하여, 국가의 중대 사안과 자신의 결정사항을 기록관이 기록하도록 한다. 각 부족의 장손을 볼모로 잡아두지 않고 행정 관료로 훈련시켜 적절한 숫자의 백성을 직접 다스리게 한다.
GIS분석가 송규봉은 저서 <지도, 세상을 읽는 생각의 프레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몽골전사들은 30년 동안 만나는 모든 군대를 물리쳤고, 만나는 모든 요새를 점령했으며, 모든 성벽을 무너뜨렸다. 몽골정벌에 대항했던 기독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의 모든 문명이 몽골기병의 말발굽 아래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이런 강력한 군대가 만들어진 근간이 무엇일까? 저자가 정리한 내용을 요약해 보자. 1) 몽골군 전원이 기마병이다. 각 군사는 서너 마리의 말을 동시에 끌고 다니며 며칠씩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한다. 전쟁 수행 속도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2) 전투능력의 차이 또한 대단하다. 몽골군은 매끼마다 고기와 분유를 먹어 뼈의 발육, 근력의 강도, 전염병 면역력과 극복 능력 등이 채식위주의 군대와 비교되지 않는다. 10진법 체제의 일사분란한 지휘통제로 전술구사가 자유자재였으며 민첩했다. 특별한 사료가 필요치 않은 초식 말을 이용함으로서 별도의 병참부대나 보급부대가 필요치 않아, 진지 이동과 대응이 신속하다. 3) 지식전쟁의 활용이다. 야율초재 같은 학자의 등용으로 학식을 이용한다. 고도의 심리전으로 내부분열, 극단의 공포심을 조장하여 스스로 문을 열게 한다. 정복 부족이나 국가의 최고 과학기술자를 흡수하고 우대하여 성을 함락시킬 지식을 적극 습득하고 활용한다. 4) 지도자와 병사의 상호신뢰 및 충성심도 빼놓을 수 없다. 칭기즈칸은 전략 구사에 아군의 안전과 생명보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전리품은 죽은 병사들 몫을 남아 있는 가족에게 균등 분배하고, 죽은 전사의 시신을 고향 초원에 묻힐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바 있는 신분이나 친소와 관계없는 철저한 능력위주의 인사행정, 이민족의 평등한 대우와 개방적인 인재흡수 등이 강한 군대의 비결로 꼽힌다.
800년 전 세계를 재편한 칭기즈칸의 나라는 다시 세계의 변방으로 몰락했다. 송규봉은 적는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상상력을 세우지 못하고 칭기즈칸이 세운 상상력의 성에 갇혀 그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일찍이 칭기즈칸이 경고했다고 한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는 흥할 것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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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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