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칼럼] 월드컵과 무대 - 월드컵이 남긴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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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人칼럼] 월드컵과 무대 - 월드컵이 남긴 아이러니

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 승인 2026-07-29 16:57
  • 신문게재 2026-07-30 19면
  • 최화진 기자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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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2026년 6월 12일 새벽, 멕시코시티의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월드컵의 막이 오르는 순간, 세계인의 귀에 가장 먼저 꽂힌 목소리 중 하나는 한국어 가사가 섞인 노래였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가수 이재가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와 나란히 무대에 섰다. 하루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또 다른 개막 행사에는 블랙핑크의 리사와 케이티 페리가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7월 19일, 뉴저지에서 열린 결승전 하프타임 쇼에는 방탄소년단이 마돈나, 저스틴 비버와 나란히 섰고, 배우 정호연은 결승전에 앞서 열린 트로피 공개 행사에 등장해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함께 트로피가 담긴 상자를 들어 보였다. 개막부터 결승까지, 이 대회의 가장 상징적인 순간마다 어김없이 한국의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라운드 위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한국 대표팀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체코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16년 만의 월드컵 첫 경기 승리를 자축했다. 12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기록에 걸맞은, 오랜만의 통쾌한 승전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경기에서 흐름이 꺾였고, 결국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후반 결승 골을 내주며 48개국 체제에서 처음 도입된 32강 진출에 실패했다. 조별리그 탈락으로 끝난 열두 번째 본선 무대였다. 감독 교체 논란과 축구협회의 행정 난맥 속에 치른 대회였던 만큼, 팬들의 실망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고개를 든다. 한 나라의 국가대표팀이 정작 그 종목의 본선 무대에서 조기 탈락하는 동안, 같은 나라의 대중문화는 대회의 개막과 결승이라는 가장 상징적인 순간을 통째로 장식했다. 조별 리그에서 조기 탄락한 나라가, 문화에서는 세계인의 시선이 가장 집중되는 바로 그 자리에 섰다는 것.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에서, 정작 승부를 가른 것은 축구가 아니라 K 컬춰였다는 역설이다.

이 역설은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 지난 몇 년간 쌓여온 흐름의 자연스러운 귀결에 가깝다. K팝은 이미 빌보드 차트의 단골손님이 된 지 오래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콘텐츠는 음악 산업의 경계를 넘어 애니메이션과 영상 시장까지 흡수하며 전 세계 대중문화의 기반 자체를 바꾸고 있다. FIFA가 개·폐막 무대의 출연자를 구성하며 한국 아티스트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제 K컬처가 '초청받는 손님'이 아니라 '무대를 채우는 주연'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월드컵조차 케이팝 없이는 완전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물론 이 아이러니를 단순한 냉소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스포츠는 오랫동안 국가가 체계적으로 자원을 투입해 온 영역이고, 문화는 상대적으로 자생적이고 산업적인 힘으로 성장해 온 영역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쪽은 후자였다. 이는 '국가가 무엇에 얼마나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스포츠와 문화라는 극명한 대비를 통해 다시 한번 던지게 만든다. 대표팀의 성적표는 4년마다 리셋되지만, 문화적 영향력은 훨씬 누적적이고 장기적으로 쌓인다는 점에서 두 영역의 시간 축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도 함께 곱씹어볼 만하다.

경기장 안에서는 아쉬움을 삼켜야 했지만, 경기장 밖 무대에서는 세계가 한국을 향해 박수를 쳤다. 손흥민을 비롯한 선수들의 도전이 조별리그의 벽 앞에서 멈춰 선 그 순간에도, 다른 무대 위에서는 이재의 목소리와 방탄소년단의 퍼포먼스가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2026년 월드컵이 한국에 남긴 진짜 스코어일지 모른다. 그라운드의 성적표는 냉담했지만, 문화라는 또 다른 경기장에서 한국은 이미 결승선을 통과해 있었다. 스포츠의 금메달은 놓쳤지만, 세계 문화의 금메달은 어느새 한국의 것이 되어 있었다는 이 아이러니. 지금 한국이 서 있는 위치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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