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코너’를 기억하십니까?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는 2011년부터 2012년까지 본보의 홈페이지를 통해 네티즌 독자들을 위해 서비스됐었습니다. 무심코 사용하는 우리말 속에 담긴 유래와 의미를 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가 출간한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게재됐었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추억의 코너를 되살려보기 위해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 시즌 2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
▲ 게티 이미지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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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에 조금 절여서 통째로 말린 조기 즉 건석어乾石魚를 일컬어 굴비라고 한다.
이 굴비는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에서 생산되는 것이 가장 명품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그 법성포 칠산 앞바다에서 제철에 잡히는 조기가 가장 우수한 생선인데다가 그 조기를 말리는 해풍과 일조량 등 기상조건이 알맞기 때문에 예로부터 법성포의 굴비가 나라의 진상품으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말린 소금에 조금 절여서 말린 조기를 굴비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인종때로 소급된다.
고려 인 때의 척신으로 이자겸(?-1126)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둘째 딸을 16대 예종의 비로 보내고서 익성공신이 되고난 뒤 다시 동덕추성좌리공신 소성군개국백이 되었다. 예종이 죽자 외손자인 태자 인종을 옹립하여 권세를 잡고서는 셋째와 넷째 딸을 인종에게 바쳤다.
이렇게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자, 자기의 일파를 요직에 기용하고 대권을 잡아 국왕 이상의 권세와 부귀를 누르던 중 ‘十八子(李)의 성姓을 가진 이가 임금이 되리라’는 참위설을 믿어 왕위의 찬탈까지 하려 들자 이 기미를 알아챈 왕 인종은 김찬, 안보린 등과 거사하여 이자겸의 일당은 제거하려다가 이자겸의 파인 척준경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이자겸은 바로 왕을 자기 집으로 옮겨 모시고 독살까지 하려는 전횡까지 저질렀다. 그 뒤 이자겸의 인척인 척준경은 이자겸과 반목이 생기면서 전날의 과오를 뉘우쳐 왕의 밀지를 받들고 김향, 이공수와 더불어 거사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잡아 영광 땅 법성포로 귀양을 보내고 잔당들도 멀리 귀양을 보냈으며 자겸의 소생 왕비마저 폐위시켰다. 이자겸 역시 영광의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이자겸이 이곳 법성포에 유배되면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특산품인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를 먹게 되고, 그 말린 조기 맛에 빠진 그는 법성포의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최상의 조기를 약간의 소금에 절여서 말린 뒤 나라에 진상하였다.
그는 이 건어물을 나라에 올리면서 이는 결코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며, 또한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의미로 진상하는 건어물의 이름을 비굴하지 않다는 뜻의 ‘굴비屈非’라고 이름을 붙여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건어물의 이름이 굴비가 되었다고 전한다.
/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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