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추억의 코너를 되살려보기 위해 ‘송교수의 재미있는 우리말 이야기’ 시즌 2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주>
▲ 게티 이미지 뱅크 |
약주藥酒의 듯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약으로 쓰는 술’, ‘막걸리보다 좀 맑은, 독한 술의 한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약주라면 술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여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막걸리 보다 맑고 독하되 소주보다는 약한 청주인 가양주를 약주라고 불렀던 것인데 지금처럼 술을 높여 부르는 말로 변한 것이다.
이 술을 약주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달성서씨 가문과 관련이 있는 숨은 내력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중기 호를 약봉이라 한 서성이라는 명신이 있었다.
대구가 본관인 그는 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에서 국경인의 음모로부터 왕자와 재상을 구하여 뒤에 병조좌랑, 경기감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김제남의 무고로 11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인조반정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와 형조ㆍ병조의 양 판서를 지냈으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모셨던 사람이다.
이 약봉에게는 앞을 못 보는 모친 이씨가 있었다.
이씨 부인은 시집가던 첫날밤에 신방에서 신랑 서해에게 자기가 앞을 못 보는 장님임을 고백했는데, 신랑은 이것도 팔자라 생각하고 오히려 부인을 극진히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손과 발 노릇까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 가정에도 불행의 바람이 불어 닥쳐 자기를 그처럼 극진히 사랑하던 남편이 일찍 죽게 되었다. 이씨 부인은 남편이 자기가 장님임에도 버리지 않고 극진히 보살펴 주고 사랑하여 준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의 교육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생계의 유지마저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여자의 몸으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 바로 술을 빚어 파는 일이었다.
비록 앞은 볼 수 없지만, 이씨 부인의 솜씨가 남다른 데다 술을 빚는데 쏟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술맛은 이내 장안에 퍼져나갔다.
이 이씨 부인이 사는 마을에는 지금의 천주교회가 있는 고개가 있었는데 이 고개 이름이 약현이었기 때문에 술 이름을 약현청주라 부르게 되었고, 이 약현청주는 소문이 날로 더하여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그 뒤 점차 이 술의 이름이 약현주라 불리더니 다시 약주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주는 잘 팔려서 부자가 되자, 그녀는 아들을 위해 독서당을 차려서 훌륭하게 길러냈다. 그 아들 서성은 드디어 대과에 급제하고 좌찬성의 벼슬에까지 올랐는데 어머니를 생각하여 스스로 호를 약봉이라 했다.
약주는 이러한 내력을 지니고 그 뒤 면면이 이어져 오늘까지 ‘약주’라는 명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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