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일이 만난 사람]구수환 PD

[한성일이 만난 사람]구수환 PD

(사)이태석 재단 이사장
남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삶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 이어 10년후 '부활'로 찾아오다
9일 CGV 개봉

  • 승인 2020-07-04 16:40
  • 수정 2020-07-04 16:40
  • 한성일 기자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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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남수단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 '울지마 톤즈'의 감독 구수환 전 KBS PD가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를 맞아 '울지마 톤즈' 후속작 영화 '부활'로 관객들을 만난다.'부활'은 9일 목요일 CGV에서 전국 동시 개봉 예정이다,

'추적 60분','세계는 지금' 등으로 잘 알려진 구수환 PD가 6일 자 중도일보 9면 <한성일이 만난 사람> 인터뷰를 위해 잠시 대전을 찾았다. 구수환 PD를 대전역에 마중 나가 인터뷰장소인 대흥동의 일마고로 오는 동안 구 PD는 삼성동 본가 이야기와 부모님 이야기를 들려줬다. 삼성동 회상사 바로 옆 신도상회를 그의 부모님이 운영하셨다고 했다. 고민이 있을 때면 대전에 내려와 삼성동 본가 좁은 골목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구 PD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지극정성인 아들이었다. 구 PD에게 듣는 저널리즘론은 마음에 큰 울림과 함께 큰 감동을 줬다. 진정성과 설득력과 감동이 있는 이야기들을 달변으로 풀어내는 구 PD와의 인터뷰는 대화 내내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이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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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PD님, 10년 전 '남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렸던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시지 못한 독자분들을 위해 이태석 신부님의 삶에 대해 소개해주실까요?

▲전쟁과 가난에 시달려온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의료봉사하시다가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의사 출신인 이태석 신부님은 지난 2001년부터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마을에 병원을 세우고 한센병을 비롯한 각종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 봉사활동을 하셨는데요. 이태석 신부님은 다재다능한 분이셨습니다. 의사로서뿐만이 아니라 선교사와 교사, 음악가로서 남수단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헌신하셨고, 세계는 그의 섬김의 리더십에 주목했지요.

살바키르 남수단 대통령은 "이태석 신부님은 내 마음에 남아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황청 국무원장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이태석 신부님에 대해 "그토록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모습 앞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지요.

고 이태석 신부님은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인제대 의대와 광주가톨릭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가 된 후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해 원주민들을 위해 헌신했던 사제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은 지난 2010년 1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10여 년 간 수단의 톤즈에서 너무나 헌신적인 사랑을 나눠줘 많은 이들이 신부님의 선종을 애도했습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은 국민훈장 무궁화장, 제1회 KBS 감동대상 대상, 제2회 한미자랑스런 의사상, 제23회 보령의료봉사상, 제7회 인재인성대상 특별상을 받으셨습니다.

하루 종일 환자 200명을 돌보고, 밤에도 쉬지 못하고 환자가 오면 튀어나가서 당직근무하듯이 일하고, 다시 낮에 환자 200명을 돌보던 신부님의 삶은 숭고하다는 말 이상의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가 힘들지요. 톤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러 간 고 이태석 신부님이 떠나고 난 뒤 톤즈 사람들은 정말 엄청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했지만 신부의 길을 택했고, 지구촌의 수많은 땅덩어리 중 아프리카의 수단을 택해 생애를 다 바쳤던 이태석 신부님의 비범한 모습은 우리에게 꽃이 되어 향기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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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CGV에서 개봉하는 영화 '부활'에 대해 설명해주실까요?

▲영화 '부활'은 이태석 신부님이 대장암으로 선종하시기 전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10여 년간 봉사 활동을 하며 그 곳의 사람들을 육체적, 정신적 질환으로부터 구해내고, 사랑을 나누어준 생전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후속작입니다. '울지마 톤즈'는 2010년 개봉 당시 국내 종교 다큐멘터리 역대 흥행 1위, 다큐멘터리 역대 흥행 5위의 기록을 세웠는데요. 영화 개봉 이후 이태석 신부님의 헌신적 삶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공감이 모아져 이태석 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10여 년 동안 이태석 재단과의 인연을 이어왔고, 지금은 이태석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헌신하다 마흔 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저는 10년 후 그의 사랑을 먹고 자란 제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의사, 약사, 공무원, 기자 등이 된 제자만 70여 명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10만 km의 대장정과 1년간의 추적이 있었습니다. '부활'은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되어 주는 감동을 주리라 믿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봉사했던 남수단 지역 아이들이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지면서 수소문을 시작했고, 남수단으로 날아가 그때 당시 아이들을 찾아 인터뷰하면서 이번 영화 '부활'이 완성됐습니다. 러닝타임 110분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종교 이야기도, 인물 이야기도, 휴먼다큐도 아닙니다. 제가 현장을 발로 뛰면서 보고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다룬 영화입니다. '울지마 톤즈'가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로 채워졌다면, 영화 '부활'은 이태석 신부님이 가르치고 사랑해준 제자들의 이야기로 꾸며졌습니다. 어린 시절 이태석 신부님의 도움을 받았던 어린 아이들은 이제 성년이 돼 있는데 예비의사인 의과대학생도 40여 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이 신부님의 헌신과 사랑을 잊지 않고 생전에 이태석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의사가 된 제자들은 이태석 신부님처럼 살아보고 싶어서 의사가 됐다고 말합니다. 그의 제자들은 생전 이 신부님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니던 한센인 마을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의사가 한센인 마을을 방문하는 것은 이태석 신부님이 떠나신 후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12시간의 진료가 끝나자 한센인들은 이태석 신부님이 돌아오셨다며 기뻐하는 모습도 영화에 담겼습니다. 영화 '부활'에는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이 이 신부님 묘에 찾아가 의사, 약사 등 자격증을 올려놓으며 깊은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공개됩니다. 저는 이번 영화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종교적 부활이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의 신념과 사랑이 제자들을 통해 부활되고 전승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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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또 다른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으로 봉사하며 살고 있어서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모두가 생전 이태석 신부님의 삶처럼 살아가고 있어서 그들을 만나면서 이태석 신부님을 만난 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흥분됐습니다. 톤즈라는 마을은 산골지역입니다. 이태석 신부님 제자들을 한명 한명 수소문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70여 명의 아이들은 다양한 전문 직업군을 갖고 이 신부님처럼 사랑을 나눠주고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수단 한센병 환자촌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 모습을 통해 "이태석 신부가 돌아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 '부활'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저는 영화 '부활'을 통해 이태석 신부님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이 신부님이 펼친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에 주목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욕심 없는 삶, 섬기는 삶, 공감, 공동체의 삶, 경청하는 서번트 리더십을 경험한 아이들의 삶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남긴 사랑과 헌신의 삶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부활했다는 의미를 담아 이번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이어받아 또다시 전승될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힘든 이 때에 국민들을 위로하고,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의 가치와 리더십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영화 '부활'이 분열된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고, 코로나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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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PD님 고향이 대전이시라 더욱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실까요?

▲저는 59년 대전 삼성동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시는 부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두 평 짜리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지만 가족애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저희 집은 교육청에서 선정한 모범가정으로 뽑히기도 했답니다(하하하).부자들만 다니는 것으로 알던 성모초에 제 남동생이 다니면서 그 개념을 깨버렸죠. 그래서 교장 수녀님이 제 동생을 너무나도 좋아하셨습니다. 그때 방송국에서 와서 라디오 프로그램 녹음을 했는데 이때 기억이 방송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중동에서 취재하고 보도하는 종군기자들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너무나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저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꿨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삼성초와 동산중, 보문고, 한남대를 나왔고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을 다녔는데 대학 입학하자마자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강원도 양구로 가게 됐는데요. 해발 1700m 고지 휴전선에서 근무하게 된 거죠.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너무나 많이 났습니다. 군대 시절은 결정적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삶의 태도가 바뀌는 시간이 됐습니다. 80년 군부독재 당시 삼청교육대를 통해 끌려오신 분들은 나이 드신 분부터 어린애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는데 너무나 착한 분들인 겁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아버지에게 '죄짓고 살지 마세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하하하). 이 시절 왜 올바르게 살아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제대 후엔 아버지 옆에 와서 신도상회 일을 도왔습니다. 삼성동 사거리 시장에 가서 복숭아, 포도 등 과일을 자전거에 싣고 건널목을 건너오는데 자전거가 힘에 부쳐 넘어지게 됐습니다. 복숭아가 바닥에 떨어져 줍고 있는데 학교 학생들이 지나가는 겁니다.그 때는 어찌나 창피하던지요(하하하).그렇지만 제 처지를 원망하기보다는 우리 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시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답니다. 부모님 가게를 도우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 보다 부모님을 도와드리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집안이 어려웠음에도 제 남동생은 성모초를 다니며 전교 총학생회장을 했고 서대전고를 나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들어갔습니다. LG그룹 중견간부로 일하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요. 저보다 똑똑한 제 동생이 저더러 앞으로 언론사가 유망한 직종이 될 것 같다고 조언해줘서 제가 KBS 방송국에 입사하게 된 겁니다(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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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생활은 어떠셨는지요?

▲방송국에서 제일 먼저 한 프로그램이 고발프로입니다. 처음에 KBS에 입사하니 강원도 강릉방송국에 발령이 나서 아침 프로를 진행하는데 신문을 보고 읽어주는 코너에서 저의 충청도 사투리 억양 때문에 심의과정에서 지적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자취하고 있던 시절 사투리를 고치려고 웅변학원도 다니고 볼펜을 입술에 물고 발성연습도 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바늘로 혓바늘을 찌르기도 하고 계속 책을 읽었습니다. 방송에서는 표준어를 써야 되는데 사투리 때문에 심의 지적도 당하고 항의도 엄청 많이 받던 시절이었네요(하하하). 강릉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너무나 많이 나서 주말에는 대전 집에 가려고 했는데 제가 초년병이라고 주말에 자꾸 일을 줘서 화가 매우 많이 나기도 했죠(하하하).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엽서를 받아 읽어주는 코너에서 편지가 정말 많이 오더군요. 안성기와 박중훈이 나왔던 강원도 영월방송국을 소재로 한 영화 '라디오스타'를 보면서 마치 제 이야기 같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하하하). 하루에 수십 통 씩 오는 엽서를 읽어주면서 방송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야기하는 소통의 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녹화방송을 하다 보니 욕심이 나서 생방송을 하게 되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생방송 중 또 욕심을 내서 청취자들에게 전화연결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화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방송국 대표전화가 폭주해 보도국까지 전화가 와서 선배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하하하). 저녁 8시부터 밤 10시까지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1층이 레코드실이었는데 신청곡 중 모르는 노래는 찾아 뛰어 내려가는 게 시간이 너무 걸려 아예 레코드판을 잔뜩 쌓아놓고 방송을 했습니다. 청취자들에게 초콜릿 같은 선물도 많이 받았네요(하하하). 제 방송을 너무나 좋아하던 어느 청취자는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매일 한 달 내내 예쁜 엽서를 꾸며 보내오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하하하). 청취자들에게 인기를 얻다 보니 다른 욕심이 나더군요.이제는 중계차를 갖고 학교로 들어가 '젊음의 864'를 진행했습니다. 이때 MC가 제 후배인 전인석 아나운서였습니다. 강릉방송국 역사상 최고의 호응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당시 국장님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더러 뭘 원하느냐고 물으시길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맡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 성향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해서 고발프로그램을 하게 됐는데요. 80세 할머니, 할아버지가 찾아오셔서 억울한 사연을 방송해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인사하시는 겁니다. 저는 임대주택 사기를 당하신 그 할머니, 할아버지를 취재하면서 제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나 열심히 취재한 거였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고맙다고 하시며 배와 사과와 함께 시루떡을 해 갖고 오셨습니다(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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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PD님은 '추적 60분'으로 유명하신데요. 이 프로그램을 맡으시게 된 사연도 소개해주실까요?

▲강릉이 관광지다 보니 경포대 해수욕장에 서울 사람들도 많이 왔는데요. 제 방송을 들으신 본사 높으신 분이 당장 서울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때 서울 가서 처음 맡은 프로그램이 바로 '추적 60분'이랍니다. 서울에서 기라성 같은 PD들이 저를 촌놈이라고 왕따 시키더군요(하하하). 그래서 자존심이 몹시 상해 승부근성을 발휘했죠. 남들과 차별화 작전이 필요해서 일부러 독한 이야기들만 맡아 했습니다. 서울 동호철교 다리 교각을 받쳐주는 나사가 풀려있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해서 새벽 2시까지 찍고 '지하철이 위험하다'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조선일보에서 기사를 받아 쓰더군요. 이렇게 승부수를 걸다가 주변의 시기, 질투에 의해 강제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인 로비도 많이 받았습니다. 방송을 못 내보내도록 갖은 압박과 회유가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면서 방송을 내보내니까 인사발령을 내는 겁니다. 그래서 KBS 노조로 가서 공정방송추진위원회 간사로 일하면서 비판과 견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미안했던지 그 당시 외국에 나갈 기회가 많아 PD들에게 인기 있던 '세계는 지금' 프로그램으로 발령을 내더군요. 그런데 저의 첫 프로그램은 전쟁터에 가서 취재하는 거였습니다. 미얀마, 태국, 라오스 사이에 위치한 쿤사 조직에 취재하러 들어가 미얀마 반군을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위험지역 취재는 찍어오면 다 특종입니다(하하하). 96년엔 이탈리아 마피아 영화 '대부'로 유명한 시칠리아 섬에 가서 마피아를 취재했습니다. 독일의 대표적 주간뉴스 잡지인 슈피겔지를 보고 여검사를 취재한 뒤 '마피아 소통에 나선 여검사의 고독한 전쟁'을 내보냈습니다. 그 당시 검찰 개혁이 어떻게 되었는지, 검사와 검찰이 왜 중요한지, 검찰과 경찰의 상황을 낱낱이 파헤쳤더니 방송 경력 10년 만에 방송대상을 받게 됐습니다. PD니까 제작부문의 상을 받아야 되는데 기자들이 타야 될 보도부문 상을 받았습니다(하하하). 저는 '추적 60분'을 근 12년 동안 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사람을 대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심을 갖고 대하는 것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고발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점은 신뢰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살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대하는지 아닌지는 상대방도 금방 압니다. 울지마 톤즈를 찍기 위해 아프리카에 갔을 때 이런 부분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발 프로그램 할 때 시청자자들로부터 속이 시원하다고 하시며 응원도 많이 받았답니다. 이때 깨달은 점이 언론의 역할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심성을 끄집어내어 세상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추적 60분' 같은 고발 프로그램은 억울한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담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밤 11시부터 12시까지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나면 시청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전화를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방송을 보고 사람들이 '너 그렇게 억울하게 힘들게 사는 줄 몰랐다'며 응원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들 고마워하시니까 제가 그 맛에 고발프로그램을 못 떠나고 그렇게 오랫동안 몸을 담게 된 거였죠(하하하).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니까 그렇게들 고마워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제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삶의 만족감을 많이 느꼈죠. 저는 다시 태어나도 PD를 하고 싶습니다. 작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현장에서 뛰는 PD였고, 지금도 영원히 PD로 남고 싶습니다. PD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 깊이 느끼며 살았습니다. 전쟁터에 취재 나가서는 그 위험한 곳을 6년 동안 방탄복을 입고 뛰어다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를 인식하는 순간이었죠. 그게 행복이란 걸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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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 그들이 말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 종군 PD가 되어 전쟁터에 가서 코소모 내전에서 사망한 종군기자들을 찍었습니다. 동네 중심 묘비에는 폭탄테러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군 기자 남편 사후에 남편을 따라 종군기자가 된 부인도 있었습니다. '존경한다'는 의미가 뭘까 생각했습니다. 존경받는 저널리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해보았죠. 저널리스트가 정치인이 되어 언론 개혁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세계적인 앵커들의 공통점은 다 전쟁터에 취재 나갔다 왔다는 점입니다.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전쟁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게 종군기자의 역할인 거죠. 거기서 저널리스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태석 신부님의 삶처럼 살아야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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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PD님은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추적 60분' 외에 KBS 스페셜에서 '스웨덴 정치를 만나다', '행복의 나라덴마크 정치를 말하다','행복한 국가를 만든 리더십'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하셨는데요.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시면서 느끼신 점이 무엇인지요.

▲국정농단으로 혼란스런 정국을 맞고 있던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정치 선진국 스웨덴의 정치 지도자상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국민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준 정치지도자들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죠. 저는 우리나라 정치의 혁명을 꿈꾸면서 KBS1TV 스페셜 '행복한 국가의 리더십 1편'에 '메르켈 리더십 국민의 마음을 얻다'에 이어 '스웨덴을 구한 섬김의 리더십'이란 타이틀로 2편을 만들어 방영했습니다. 스웨덴 정치 지도자 잉바르칼손 전 총리 등의 정치 노하우를 전격 취재해 방영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었지요. 정치 지도자가 떠난 자리를 그리워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스웨덴 국민들을 통해 국민들의 웃음을 되찾아준 정치지도자의 헌신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권력의 주인은 국민이어야 하고, 주인이 고통받는 세상은 사라져야 합니다. 갈등과 불신을 화합과 신뢰로 바꾸고 권력의 주인이 국민이 되는 참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스웨덴 정치지도자들처럼 특권 없는 정치를 통해 우리의 정치도 벤치마킹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을 생각하다가 행정과 복지가 잘 되어있는 북유럽에 가서 국회의원들을 다 만나봤습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그 나라 국회의원들은 명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봉사정신으로 남을 위해 산다는 점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똑같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과의 공통점은 상대방의 말에 경청을 잘해줬고, 진심으로 대해줬습니다. 사리사욕을 챙기는 욕심이 없었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공동체를 중시했습니다. 나 혼자 잘 사는 삶이 아닌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동일시됨을 느꼈습니다. 스웨덴에 취재 갔을 때 5선 국회의원을 만났는데 나이 70 먹은 국회의장 출신 노인 국회의원이 지하철에 타도 아무도 안 쳐다보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권위의식'이라는게 전혀 없었죠. 정치인이나 택시기사나 연봉의 차이가 없고, 특권이 없다 보니 죽어라 봉사만 하는 봉사마인드가 투철한 사람만 국회의원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 나라 국방장관 가방 속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책과 서류 외에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30명이 찍혀 있는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자식, 손자, 친척들과 찍은 사진이었는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이고,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보물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국민행복도가 높은 나라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회의원들이 특권이 많고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니까 존경받는 국회의원이 드문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국회의원의 특권, 수당, 의전 모두 다 내려놓으면 북유럽국가들의 국회의원처럼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철저한 자기희생이 전제돼야 하는 겁니다. 권력과 힘이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니까 기득권을 안 내려놓으려는 거지요. 우리나라 정치는 '정치 개혁'이 아닌 '정치혁명'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되는 거죠.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행복한 국가를 만든 리더십'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에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리더십센터를 가서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섬김의 리더십)'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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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PD님께서 10년 전 '울지마 톤즈'에 이어 이번에 '부활'을 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했습니다.이태석 신부님과는 어떤 인연이신지요?

▲사람들은 저를 가톨릭 신자로 아시는데 전 불교신자입니다(하하하).제가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된 것은 프로그램 아이템을 찾으러 부산에 내려갔을 때인데 이태석 신부님 선종 소식이 들렸습니다. '남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선종'이란 기사를 보고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신부님의 삶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을 온몸으로 실천하신 분이었죠. 신부, 목사, 스님은 절대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면 안됩니다. 갈등의 시대에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죠. 성직자들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종교비리가 계속 터져 나오는 시대에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종교지도자를 원합니다. 혹자는 저더러 왜 이태석 신부님을 10년째 우려먹느냐고(?) 하시는데 이 분처럼 살면 행복한 삶이기 때문에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봉사는 희생이 전제돼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태석 신부님 유가족들을 만나 취재했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TV에서 방영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영상 편집을 토대로 만든 영화가 바로 '울지마 톤즈'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제가 힘들 때 기대고 싶은 분, 제가 힘들 때 용기를 주는 분입니다. 저는 직장에서 힘들 때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MB 정권 들어 압력에 의해 제가 연출하던 시사 고발프로그램 '추적 60분'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심적 갈등이 매우 심했었거든요. 너무나 기분이 안 좋고 힘들 때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만난 게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신부님의 삶을 보며 반성하게 됐습니다. 제 갈등은 제 욕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었고 욕심으로 가득했는지 신부님의 삶을 보면서 스스로 깨우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 사후 10년이 지나도록 예수님의 삶을 살다 가신 그분을 잊지 못해 그분의 영화를 다시 만들게 된 거지요.

제가 적을 두고 있는 경북 청송 무상사 법당에서 주지 스님의 설법 대신 '울지마 톤즈'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불자들이 다 감동을 받고 울었죠.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신도 한 분이 오셔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삶을 살았는지 깨닫게 됐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스님은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입니다"라고요(하하하).

지난해 10월 이태석 신부님의 남수단 돈보스코 학교 제자들을 이태석 신부님의 묘지가 있는 전남 담양의 살레시오수도원 묘역에 초청해 함께 참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9일 개봉하는 영화 '부활'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게 되지요.

제가 이번 영화를 만든 이유는 관객을 많이 모아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전 돈 한 푼 받지 않고 이 영화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투자사들로부터 투자를 받으면 수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부담을 받고 싶지 않아서 어머님, 누이동생 등에게 자본을 빌려 만든 영화입니다. 집안에서 가족들의 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번 영화의 내레이션도 전문 성우 대신 10년간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지켜본 제가 맡아 하고 원고도 직접 썼습니다. 영화가 잘 되면 또 하나의 뉴스거리가 될 것입니다. '부활'에 나오는 스토리들이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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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PD님은 지난해에 KBS에서 정년퇴직하신 후 현재 '구수환 PD와 함께하는 저널리즘 스쿨 교장'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까요?

▲저널리즘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을 가르치려 들면 안됩니다. 저는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치는 일로 제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섬진강 폐교에 가서 순천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농촌 아이들을 불러 저널리즘 스쿨을 열었습니다. 이 곳에서 11주 과정을 마친 후엔 전남과 경남의 경계지점인 하동에 가서 영호남 아이들을 대상으로 저널리즘 스쿨을 운영했습니다. 처음엔 25명이던 지원자가 150명으로 늘었습니다. 마지막 주 수업은 KBS 본사에 초청해 뉴스 방송 프로그램 제작 현장을 견학시켰습니다. 영화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어서 시작한 저널리즘 스쿨입니다. 기자와 PD가 되면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죠. 종군기자 이야기도 해주고,제가 찍었던 프로그램 이야기들을 해주면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합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기차 타고 내려가 아이들을 만나는 저를 보고 아이들도 저의 진심을 알아주더군요. 그동안 남원, 청주, 하동, 통영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저널리즘 스쿨을 열어왔는데요.약 300여 명의 아이들이 저널리즘 스쿨을 거쳐갔습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잠시 휴강상태인데요. 저는 아이들이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인재들이 되길 원합니다. 아이들에게 기자와 PD는 절대 권력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라고 강조하죠. 이태석 신부님처럼 사는 게 행복이라고 말해줍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는 아이들을 보면서 너무나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는 정치학교를 만들고자 합니다. 한국 정치가 아닌 스웨덴, 덴마크와 같은 정치를 가르치는 거죠. 국회에서 특권 없애기 특위도 만들어진 기억이 나는데 국민들이 정치인에게 요구하기 전 뭔가를 알고 있어야 요구도 가능해지는 거죠. 이태석 신부님 영화를 보고 종교를 떠나 이렇게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비교판단의 정보를 제공하겠죠.

저널리스트들은 판결자가 아니라 계속 이야기하는 전달자입니다. 일반 국민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는 정보전달자로서 국민들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입니다. 기자와 PD는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저널리스트들이 직업인으로 전락해서 문제입니다. 프라이드가 나자신을 위한 프라이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한 프라이드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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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퇴직 전까지 보직에 대해 신경 안 쓰고 현장에서 PD로 일했습니다. 기자는 권력을 감시해야 됩니다.

제가 정년 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후배들이 너무나 좋아합니다. 언론인처럼 좋은 직업이 없습니다. 사회에서 빈부의 문제, 갈등의 문제를 다루고, 취재하고, 보도하면서 사회를 밝게,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보람 있습니까. 저널리즘은 사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종교와 언론이 신뢰를 얻는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밝아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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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PD님,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실까요?

▲저는 이 사회에서 서번트 리더십을 확산시켜 나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저널리즘 스쿨을 본격적으로 운영해보려 합니다.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주는 일도 좋지만 사람한테 투자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남수단 제자들 중에서 의사가 40여 명 배출된 것만 봐도 사람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지요. 이태석 신부님 형님 신부님이 작고하셔서 그 분의 뒤를 이어 제가 이태석 신부님 재단 이사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태석 재단에서 해야 될 일은 이태석 신부님처럼 남을 섬기는 삶을 아이들에게 확산시키는 일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만족감과 보람을 느끼는 삶이 아닐까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수업을 듣고자 하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와주면 기꺼이 즐겁게 가르칠 것입니다. 영화 '부활'을 보고 단 한 사람의 삶이라도 바뀔 수 있다면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그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태석 신부님이 남긴 사랑과 헌신의 삶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희망의 불로 되살아나는 감동을 담아 이번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는 영화를 많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돈과 명예, 이기심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교육 현장에 꼭 필요한 리더십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특히 코로나 19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을 위로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데 함께하고자 간절한 마음을 담았으니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 섬기고, 경청하고, 공감하는 서번트 리더가 되길 희망합니다.


대담, 정리 한성일 국장 겸 편집위원 hansung007@





구수환
-구수환 PD는 누구?

▲1959년 대전 출생. 삼성초, 동산중, 보문고, 한남대 생물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저널리즘학 석사.

<경력>

1986년 KBS 입사. KBS TV 제작본부 기획제작국 프로듀서. KBS 추적 60분 책임 PD 및 MC(2004~2008). KBS 스페셜 PD 역임. 종군기자이자 시사고발 프로듀서. 현재 구수환 PD와 함께하는 저널리즘 스쿨 교장.이태석 재단 이사장

<대표 프로그램>

'추적 60분',' KBS 스페셜','스웨덴 정치를 만나다'(2015), '행복의 나라 덴마크 정치를 만나다(2016), '행복한 국가를 만든 리더십'(2017). '울지마 톤즈'(2010), '독점공개 공옥진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2009)','종군기자 그들이 말한다'(2004),'최초공개 세계최대마약지대 골든 트라이 앵글이 한국을 노린다'(1999).

영화 '울지마 톤즈'(2010)

<수상 경력>

휴스턴 국제영화제 다큐 대상(2011), 가톨릭 매스컴대상(2012), 영화기자가 뽑은 최고의 독립영화상(2011), 방송대상 사회부문상(2011), 방송대상 보도부문상(1996).

<저서>

<울지마 톤즈 그 후 선물>(2010), <대한민국 신 국부론 중국속으로>(2015), <당신의 아이는 안전합니까>(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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