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철도영웅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 일과 작전목적에 오류를 조명한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팀장은 같은 논문에서 전쟁 중 대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이 상대측에 정치적 타격을 주는 의도에서만 생산·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임 팀장은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 논문에서 대전전투를 취재한 전쟁 특파원 20명 그리고 인민군과 함께 남하해 대전을 취재한 종군작가, 미 육군 통신대, 북 기관지 해방일보 등을 분석했다.
먼저, 임 팀장은 논문을 통해 미군 통신대는 대전에서 한국 경찰과 군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기록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1950년 9월 19일 대전수복 후 목격된 인민군에 의한 학살사건은 적극적으로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미군 육군통신대의 대전지역 영상을 보면 1950년 7월 7일 대전비행장에 도착한 워커 중장과 영접 나온 딘 소장, 10일 대전역 앞 곡사포 끌고 가는 대전 시내 모습 등에서 9월 28일 수복 후에는 대전형무소 학살 희생자, 30일 대전형무소 인근 야산의 학살 희생자, 10월 5일 구덩이와 들판의 시체 등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북한은 문학가들을 인민군 부대에 배치해 종군기, 전선실기, 전투기 등을 작성했는데 인민군을 해방자로서 영웅화하거나 침략자 범죄자로서 미군을 고발하는 두 시선에서 대전전투 후의 참상을 그렸다.
북한 기관지 해방일보는 대전점령 후 '죽엄의 계곡 골린골의 참상', '종군수첩에서(2) 대전에서' 등을 통해 민간인 학살 참상을 고발했으나 역시 인민군 점령기 대전형무소 등에서 자행된 인민군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은 외면하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임 팀장은 논문을 통해 "대전에서 군·경에 의해 민간인 학살 7000여 명,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1500여 명 등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라며 "상대방이 저지른 학살과 같은 민감한 사안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재현시켜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으나 정작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은 철저히 외면하고 망각시켰다"라고 전했다.
특히, 이번 논문을 통해 한국전쟁기 대전의 민간인 학살 정황을 보도한 기자와 매체가 추방되거나 폐간되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기사를 전송할 통신선로가 있고 기사와 사진을 직접 일본을 가져갈 수 있는 공항이 있는 대전에 미군사령부가 설치된 이후 최대 60여 명의 외신특파원이 대전에 상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특파원 히긴스는 당시 김태선 내무부 치안국장 인터뷰 기사에서 "여러 가지 변장을 하고 미국 전선을 침투해 후방에서 병력을 공격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하고 있다"라며 "경찰은 총살을 집행하기 위해 초과 근무를 해왔다"라고 1950년 7월 13일자 기사를 세계에 타전했다.
특파원 히긴스가 한국 경찰에 의한 게릴라 처형을 언급한 기사는 민간인 학살로 의심되는 정황으로 소련의 통신사 타스(TASS)와 북한군 기관지 해방일보에 인용 보도됐다.
특파원 히긴스는 7월 15일 기사에서 "한국 경찰 관계자들은 경찰에 의해 어떤 사형도 집행되고 있지 않다고 부인했지만, 한 미군 연대장은 한국 경찰이 '한국 스파이'를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라는 내용을 추가 보도했다.
같은 시기 영국의 ‘픽처포스트’의 특파원 스티븐 시몬스와 헤이우드 메기가 대전에서 취재해 "최전방 지역에서 반역자로 의심되는 한국인들이 처형되는 길 위 트럭에 실려 있다"라는 보도와 함께 짐칸에 실린 남성과 이를 감시하는 군인의 사진을 보도했다.
유엔 참관인이 조사한 사건으로 기사에 명시했으나 세계 각국은 이를 민간인 학살 정황으로 보았다.
해당 사진과 보도는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공주형무소에 수감됐던 보도연맹원들의 학살장면으로 실제 확인됐다.
임재근 팀장은 "히긴스 특파원은 대전에서 일련의 보도 후 일본으로 추방당했고 픽처포스트의 편집장은 나중에 해고당하는 등 학살을 다룬 전쟁 특파원들에게 고난이 있었다"라며 "전쟁기억 재현은 오랫동안 배제됐던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기반으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라고 제안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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