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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
초려의 국정 쇄신책이 우국(憂國)에서 비롯한 현실적 방도였음은 그에 대한 성정과 평가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1765(영조 41)에 지은 옥과(玉果) 전 현감(前縣監) 이장회(李長淮)의 만사(輓詞)를 보면 "지조에는 초옹의 집안 법도가 들어 있고 志操草翁家法在"라고 했다. 초옹은 초려 이유태를 가리킨다. 만사에서 이장회 지조의 연원을 경주 이씨 집안 선조인 초려 이유태 가문의 법도에서 찾았다.
지조의 사전적 의미는 '원칙과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나 기개'이다. 후손들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던 존경하는 선조가 초려였다. 초려는 "… 아뢰기를, '전 참의 이유태가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니家甚貧乏 은전을 내려 보살펴 주어야 할 듯 합니다'고 하자 임금이 본도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주게 하였다(『현종(개수실록)』 8년 정미(1667) 6월 15일(戊子)"고 했듯이 청빈한 삶을 살았다.
동춘당 송준길이 사헌부의 종3품 관직인 집의(執義)를 사직하면서 1649년(효종 즉위년) 막 즉위한 효종에게 올린 소(疏)에서 "오늘날 제신(諸臣) 가운데 재학(才學)이 뛰어나고 충성이 순박하여 안팎의 칭송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하루도 전하의 곁에 있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유태와 권시(權?) 등도 역시 학식이 해박하고 지려(智慮)가 심원하여 사류(士類)의 기대가 매우 무거운 사람들입니다. 잔약하고 누추한 신도 외람되이 유악(?幄)에서 모시고 있는데 이 두 신하는 아직 먼 외방(外方)에 있으니 이는 마치 쭉정이가 알곡 앞에 있는 꼴이어서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부르시어 경연에 입시케 하소서!(『동춘당집』 권1, 소차(疏箚)"라고 진언하였다. 동일한 내용은 실록에도 보인다.
경연은 조선 시대 임금의 학문 수양을 위해 임금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는 관청을 이른다. 왕에게 통치 철학과 국정 운영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였다. 그러한 자리에 저명한 송준길이 강력 천거할 정도로 초려의 학식과 인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1675년(숙종 1) 1월 부수찬(副修撰) 윤지선(尹趾善)의 상소에서 "이유태로 말하면 임하(林下)에서 머리가 희어 지적할 만한 흠이 없는데 허무한 것을 꾸며서 곧바로 헐뜯었으니 이러한 의논이 어찌 인심을 복종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기록과 1675년(숙종 1) 2월에 호조참의 김만중(金萬重)이 상소하기를 "신은 평소에 송시열·이유태·고(故) 판서 송준길을 존모(尊慕)하여 모범으로 삼았는데 전후 대론(臺論)은 그 헐뜯음을 극진히 하였습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헌부나 사간원 등으로 탄핵을 숱하게 받았지만 유명한 소설 '사씨남정기'의 저자인 김만중은 오히려 초려를 조선 후기 거유(巨儒) 우암이나 동춘당에 비견해 존모 대상으로 꼽았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존모 즉 '받들어 공경하고 그리워함' 대상이 몇이나 있을까?
익히 알려져 있듯이 초려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김집(金集)·송시열·송준길·권시와 함께 '호서5현(湖西五賢)' 혹은 '충청5현'이나 '산림5현'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5현'과 같은 개념적 용어에 대한 전통시대 문헌적 근거 제시가 없다. 숱한 이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적어도 인터넷 매체에서 근거를 적시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초려 이유태의 국정 쇄신책인 기해봉사를 접하면 존모하는 마음이 일렁일 것이다. 21세기 필자만의 소견은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리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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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