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 거실창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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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 거실창을 보며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 승인 2026-07-28 17:10
  • 신문게재 2026-07-29 18면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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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장
한 곳에서 이사없이 27년을 살던 아파트 밀집지역을 벗어나서 외곽으로 이사온 지 5년이 됐다.

남편의 퇴직을 얼마 앞두고 조금 한적한 동네로 이사하자고 해서 어려운 결심을 했었던 것이다. 매물로 나온 집들을 들러 보다가 거의 서향에 가까워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덜컥 계약을 하고 말았다. 앞산이 온 몸을 밀고 들어와 거실 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앞산의 듬직한 자태를 볼 수 있으려니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오년 동안 살면서 앞산이 가져다 주는 선물은 거실 창을 고정된 액자로 삼아 자리잡고 있는 듬직한 산의 모습보다 매일 매일 또는 매 순간 살아 움직이며 다르게 변화하는 색의 향연이라는 것을 알았다. 계절에 따라서는 물론이고 아침과 점심때가 다르고 해가 저무는 오후와 저녁이 달라서 시시각각으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색의 향연을 펼친다. 비라도 오면 농밀한 느낌의 대기가 더해져서 더욱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산에서 펼쳐지는, 순간순간 달라지는 색의 잔치를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 세상을 만들 때 하느님은 온갖 색을 모아다가 만드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색들이 부딪히고 뒤섞이며 서로 살을 부비면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 항상 놀랍기 때문이다. 색들이 역동적으로 향연을 펼치는 앞 산을 보면서 문득 자연의 색들을 무슨 무슨 색으로 지목해서 이름 붙이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같은 녹색이라도 그 속에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녹색들이 무수하게 많고 질감이나 촉감도 다르기 때문이다. 비 올 때와 비 개인 후, 맑은 해가 있을 때, 또는 구름낀 날. 바람불 때와 잔잔할 때 등 매 순간의 변화에 산의 나무와 온갖 풀과 꽃들은 색 뿐 아니라 질감, 촉감을 무한하게 변화시키며 한 순간도 정지된 상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을 구분해서 무슨 색, 무슨 색이라고 이름 붙여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한계가 빤한 일인지를 실감하는 것이다.

화실에 앉아 테이블 위를 보면 수많은 물감들이 색깔별로 가득하다. 물감마다 색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런데 빛이 투과될 듯한 연한 연두와 햇빛에 반짝이는 두툼하고도 속깊어 보이는 짙푸른 초록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인공적으로 만든 안료로 자연의 색을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화가들은 늘 여러 색상의 물감들을 섞어 사용해서 원래의 물감색 뿐 아니라 다양한 색의 변화를 만들어 내고, 덧칠하고 문질러 보고 하는 등의 다양한 사용방법들을 실험하면서 질감과 촉감을 더해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화가의 손에서 무한한 확장과 변화가 생겨난다.

또한 눈에 보이는 모습이나 색, 질감을 있는 그대로를 똑같이 재현하기보다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 작가의 눈으로 해석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작가 고유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묘한 자연의 변화무쌍한 색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주도로 나의 그림을 그리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자연(自然)이란 단어 자체가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인위적으로 스스로 그러한 색을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며 보여주는 역동적인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늘 겸손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해인 수녀의 시중에 겸손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자기 도취의 부패를 막아주는 겸손은 하얀 소금", "결 고운 소금으로 아침마다 마음을 닦고 또 하루의 길을 가네 짜디짠 기도를 바치네" 이해인 수녀에게 겸손은 마음가짐이 부패하거나 상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하얀 소금과 같은 것이다.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나 성취감 없이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겸손한 마음을 잃으면 깊이있는 작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해 나가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거실의 커튼을 열고 앞산이 내게 보여주는 색의 향연을 바라보면서 높고 높은 스승을 대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게 된다. 고은의 그 꽃이란 시에선 이것을 짧고 분명하게 일러 준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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