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한여름밤 샤워 후엔?

  • 전국

[우난순의 식탐]한여름밤 샤워 후엔?

  • 승인 2018-07-20 09:00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180719_152324869
나는 수박을 먹는다. 체질상 추위를 많이 타는 이유로 겨울은 딱 질색이다. 나에게 겨울은 그야말로 인고의 계절이다. 하여 여름이 오면 내 세상인 셈이다. 옷 입기도 간편하고 무엇보다 수박이 나오는 계절 아닌가. 참외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굳이 찾지 않는데 수박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일주일에 수박 한 통씩을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수박. 아, 신은 어찌하여 이토록 훌륭한 과일을 지상에 내려보내 주셨을까. 이런 나를, 수박을 좋아하지 않는 언니는 쳇! 하고 비웃기 일쑤다. 뭐 개인의 취향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하여간 언니집에 갈 때 수박 사들고 가는 건 예의에 굉장히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런 언니도 어렸을 적엔 잘 먹긴 한 것 같은데 말이다.

식구가 많은 우리 집은 먹어도 먹은 표가 안 났다. 6남매를 둔 엄마가 종종 하던 얘기가 있다. 시루떡을 한 시루 쪄서 먹여도 먹었다는 놈은 하나도 없었단다. 입이 많은 지라 밥상머리에서 아귀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절이 아니어서 그땐 누구네라 할 것 없이 삶이 곤궁했다. 여름 날 수박장수가 구루마로 수박, 참외를 가득 싣고 동네 정자나무 아래 나타나면 동네는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냥 들떠 초여름에 수확한 보리를 집집마다 고무 다라이에 담아와 어른 머리통만한 수박을 사간다. 당시 시골의 시장 논리는 물물교환이 지배적이었다. 쌀, 보리, 콩, 계란, 닭 등 집에서 키운 것들을 생필품과 맞바꾸는 형식이다.

잊혀지지 않는 아이가 있다. 상구라는 아이인데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한번은 그 애가 정자나무 아래 땅에 떨어진 참외껍질을 주워 먹고 있었다. 흙묻은 참외껍질을 아무렇지 않게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걔네 집은 동네가 떠들썩할 정도로 늘 불화가 심했다. 상구 엄마는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한테 딱히 이유도 없이 쫓겨나 한참만에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런 이유로 상구와 동생들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상거지 같은 몰골로 헤매는 게 다반사였다. 참외 껍질을 먹는 상구를 본 아주머니들이 혀를 차며 상구 당숙 할머니를 불렀다. 신수가 훤한 면장 사모님인 상구 당숙 할머니는 상구에게 참외 한 개 쥐여주며 귀찮은 파리 쫓듯 집으로 보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처럼 불쌍한 상구네만 빼고 그 날은 집집마다 수박 뽀개지는 소리가 요란했을 터다. 수박을 잘라 보면 간혹 속이 허연 덜 익은 수박도 나온다. 그러면 달리기 잘하는 오빠가 수박장수한테 갖고 가 바꿔오기도 한다. 우리는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각자 수박 반 통씩을 차지하고 마루에 둘러 앉아 엄마의 묘약을 기다린다. 엄마는 각각의 빨간 수박 속 위에 흰설탕을 한 수저씩 뿌린다. 그러면 우리는 수저로 수박 속을 판 다음 설탕과 섞어 퍼먹는다. 그냥 먹어도 충분히 달지만 엄마에게 설탕은 모든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엑기스인 셈이다.



미적 감각이 섬세한 예술가들은 과일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는다. 일본의 '문제적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잘 다뤘다. 성장과정이 남달랐던 만큼 그의 작품은 독특해 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이 포르노에 가까워 변태라고 비난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내를 모델로 삼기도 한 아라키의 작품은 그야말로 에로틱의 정수를 보여준다. 아라키는 수박을 남성 욕망의 메타포로 간주했다. 기모노 입은 여성과 빨간 수박. 뭔가 수상쩍지 않은가. 짙은 화장을 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양 손으로 수박을 움켜쥐고 먹는다. 앞에는 빨간 속살을 드러낸 깨진 수박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사물의 정체성이 예술을 통해 달라질 때의 쾌감!

대기가 지글지글 끓는 이 염천에 나는 여름을 만끽한다. 더위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눈 흘기겠지만 겨울을 견딘 보상이라고 생각하련다. 수박이 젤 맛있을 때는 따로 있다. 퇴근 후 저녁 먹고 공원에서 운동 후에 먹는 수박은 나를 겸허한 인간으로 만든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다는 거다. 파김치가 된 몸을 질질 끌며 퇴근하는 레미제라블의 고단한 인생들. 이들은 무엇으로 위안을 삼을까. 땀에 절은 몸을 샤워 후 대접에 수박을 가득 퍼 담아 TV 앞에 앉는다. 이럴 땐 시시껄렁한 오락 프로를 보는 게 제격이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수박을 먹으며 낄낄거리는 내 인생이 과히 시시하진 않다. 한 가지 성가신 게 있다. 자다가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과즙 덩어리 수박이니 감수할 수밖에. 그렇다고 변기가 깨진 적은 없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KINS 기밀 유출 있었나… 보안문서 수만 건 다운로드 정황에 수사 의뢰
  2. 수도권 뒤덮은 러브버그…충청권도 확산될까?
  3. [춘하추동]새로운 시작을 향해, 반전하는 생활 습관
  4. 3대 특검에 검사 줄줄이 파견 지역 민생사건 '적체'…대전·천안검찰 4명 공백
  5. aT, 여름철 배추 수급 안정 위해 총력 대응
  1. [행복한 대전교육 프로젝트] 세상을 설계하는 대덕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
  2. 김태흠 충남지사 "5개 비전으로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
  3. 사단법인 사랑의 사다리,기획재정부 공익법인 지정
  4. 2025 농촌 재능나눔 대학생 캠프 스타트...농촌 삶의 질 개선 기여
  5. 농협, 'K-라이스페스타'로 쌀 소비 붐 조성

헤드라인 뉴스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경쟁 입찰 조회수 부풀리기 의혹 제기도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경쟁 입찰 조회수 부풀리기 의혹 제기도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비상대책위원회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가 상가 정상 운영을 위한 대전시민 1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대전시에 공청회 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비대위는 경쟁 입찰 당시 상인 대부분이 삶의 터전을 잃을까 기존보다 많게는 300% 인상된 가격으로 낙찰을 받았는데, 높은 조회수를 통해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도록 조작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와 대전참여연대는 2일 대전시청 북문에서 '지속 가능한 중앙로 지하상가 운영을 위한 시민참여 공청회 청구 기자회견'을 열고 대전시에서 입찰을 강행한 결과 여..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반석역 3번출구, 버드내초인근 상권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반석역 3번출구, 버드내초인근 상권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직원 대부분 반대·이직 동요"…해수부 이전 강행 무리수
"직원 대부분 반대·이직 동요"…해수부 이전 강행 무리수

"해수부 전체 직원의 86%, 20대 이하 직원 31명 중 30명이 반대하고, 이전 강행 시 48%가 다른 부처나 공공기관으로 이직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최민호 세종시장이 7월 2일부터 예고한 '해수부 이전 철회'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이날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5동 해수부 정문 앞에서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란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해수부 이전 철회를 촉구하는 입장을 정부부처 공무원을 넘어 시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발걸음이다. 그가 해수부 이전에 반대하는 입장은 '지역 이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의정활동 체험 ‘재미있어요’ 의정활동 체험 ‘재미있어요’

  • 도심 열기 식히는 살수차 도심 열기 식히는 살수차

  •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중앙로지하상가 비대위, 대전시에 공청회 요구

  • ‘수영하며 야구본다’…한화 인피니티풀 첫 선 ‘수영하며 야구본다’…한화 인피니티풀 첫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