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육개장과 연대의식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육개장과 연대의식

  • 승인 2020-05-20 18:12
  • 신문게재 2020-05-21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200520_100535063
대전역 앞 인쇄골목엔 이름도 발랄한 '명랑식당'이 있다. 메뉴는 육개장 하나다.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이는 5월 초, 육개장을 먹으러 갔다. 재작년에 처음 가 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와글와글한 시내 지하상가를 벗어나 인쇄골목에 들어서자 딴 세상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내리꽂는 거리는 한산했다. 인쇄소의 기계 소리만이 적막감을 깼다. 오랜만이어서 식당 위치가 헷갈려 연신 두리번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찾아갔을 땐 등에 땀이 맺혔다. 오래된 골목 구석에 조붓하게 자리잡은 식당은 40년이 됐다. 1대 석기숙 할머니는 물러나고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아들이 운영한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허름한 식당이지만 안은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다. 노란 장판이 깔린 방바닥에 털썩 앉아 시원한 물을 마시고 나니 비로소 더위가 가셨다.

이 집 육개장은 단순하다. 고사리, 근대, 숙주나물은 없고 오직 대파만 잔뜩 들어갔다. 결 따라 쪽쪽 찢은 소고기도 제법 많다. 보통의 육개장은 매워서 기침과 콧물을 훌쩍이며 먹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 육개장은 대파의 달큰함 때문인지 자극적이지 않다. 모름지기 밥집의 생명은 밥이다. 술밥처럼 고슬고슬한 쌀밥은 국물에 말아도 퍼지지 않아 씹는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점심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손님들이 꾸준히 들어왔다. 혼밥 먹는 사람도 몇명 눈에 띈다. 코로나19 때문에 적당히 떨어져 앉아 말없이 뜨끈한 육개장만 먹는 풍경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육개장 한 그릇 싹 비워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한가롭게 골목을 걸었다. 옛 시절 번성했던 도심은 이젠 찾는 이 없는 쓸쓸한 고대 도시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았다. 요란한 중국집 간판, 이름도 어여쁜 장미여인숙, 약 방앗간의 오자투성이 간판은 절로 미소를 짓게 했다. 한때 유명했던 한밭식당도 아직 있었다. 위풍당당한 극장식 카바레는 지금도 영업을 할까? 가게들 앞에는 하나같이 화분이 옹기종기 모여 푸르른 생명을 이어 주었다. 아, 아카데미 극장! 신문사 입사한 그 해 여기서 입사 동기들과 '원초적 본능'을 봤었지. 꽉 찬 좌석에서 뿜어내는 숨 막힐 듯한 열기가 대단했는데, 화려했던 명성은 온데간데 없고 쓰레기만 뒹구는 처지가 됐다. 추억이 필름처럼 빠르게 돌아가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어느 골목에 들어서자 서너 명의 할머니들이 길 가 의자에 앉아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인사했다. 그들은 쏘는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뭣 하러 왔어? 이런 일에 관심 있어?", "여긴 함부로 다니면 안돼. 여자 있는 거리야." 말로만 듣던 홍등가였다. 할머니들은 성매매 중매인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한다. 생존의 사각지대에 놓인 거리의 여자들. 과연 우리는 인간다운 세상을 살고 있을까. IMF는 재벌과 정치권력이 결탁을 공고히 하는 기회가 됐고 가난한 사람들은 벼랑으로 내몰았다.

음식은 부자에게 취미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없는 사람들에겐 생존의 문제다. 육개장은 서민의 음식이다. 적은 양의 고기와 온갖 채소에 물을 넉넉히 부어 푹 끓이면 여러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서양의 스튜도 같은 맥락이다. 거기도 가난한 이들이 존재했을 테니 말이다. 육개장은 장례식장에서도 단골 메뉴다. 이 음식은 저승길 떠나는 망자가 이승의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호의 아닐까. 인간에게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경제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수치로 보여주는 실업대란이 뉴스를 장식한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견뎌야 할까. 지금 우리는 고기 몇 점에 갖은 푸성귀 넣어 한 솥 끓인 육개장을 나눠먹는 연대가 필요하다.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이제는 공소청, 중대범죄수사청 시대... 우려 목소리 여전
  2. 고성규 한의학연구원장 "한의뇌신경과학 공동연구 확대 및 국제화"
  3. 국민의힘, '사고당협' 조직위원장 임명… 대전 서구을은 추가 논의
  4. 제24회 이동훈미술상 신현국 작가 본상 영예
  5. 지역 최고의 인물 화가 홍상혁 화백 개인전
  1. 서산시 해미읍성 옆 유휴공간이 '꽃밭'으로, 주민 손길로 새단장
  2. 대전사랑메세나·대전시 새마을회, 나눔과 봉사 실천 위한 협약식
  3. '천안흥타령춤축제 2026' 개막, 참여형 축제로 탈바꿈
  4. 대전 폭염 관련 구급출동 35건…전년 대비 35% 감소
  5. 수능 서·논술형 도입에 학교도 평가 변화…대전은 교사 전문성 강화

헤드라인 뉴스


이젠 공소청·중수청 시대… 업무공백 우려 속 출범

이젠 공소청·중수청 시대… 업무공백 우려 속 출범

검찰청이 폐지되고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이 2일 새롭게 문을 연다. 지역에서는 대전고등검찰청이 대전광역공소청으로, 대전지방검찰청이 대전지방공소청으로 변경돼 이날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한다. 개정 정부조직법이 시행되면서 검찰청은 1948년 설립 이후 78년 만에 폐지되며 업무는 10월 2일부터 수사·기소 분리 방침에 따라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으로 이원화됐다. 쉽게 말하면 검찰에서 수사 기능은 떼어내고 공소, 그러니까 재판 관련 업무만 남긴 '공소청'이 새로 출범한 것. 이와함께 기존의 경찰과 검찰, 공수처가 아닌 '중수청'이..

충청광역연합 `돈·권한` 싣는다… 특별법 제정 첫발
충청광역연합 '돈·권한' 싣는다… 특별법 제정 첫발

충청권 4개 시·도를 하나의 생활·경제권으로 견인할 충청광역연합의 권한과 재정 기반을 강화하는 특별법 제정 논의가 본격화된다. 현재 시·도에서 넘겨받은 사무를 수행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가 권한과 재원을 확보해 충청권 공동사업을 보다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1일 대전시와 충청광역연합 등에 따르면 2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대전·세종·충남·충북과 충청광역연합이 참여하는 '충청광역연합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린다. 이날 4개 시·도는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위해 국회와 중앙정부에..

대전·충북 아파트 매매가 상승폭 축소…세종 상승 전환, 충남 하락세 유지
대전·충북 아파트 매매가 상승폭 축소…세종 상승 전환, 충남 하락세 유지

대전과 충북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오름폭은 축소됐다. 세종은 상승 전환했으며, 충남은 낙폭을 줄였다. 전세가격은 충청권 4개 시·도 모두 상승세를 나타냈다. 1일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2026년 9월 넷째 주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대전 집값은 전주보다 0.01% 상승했다. 7월 중순 상승 전환한 이후 오름세를 이어갔지만 전주(0.03%)보다 상승폭은 0.02%포인트 줄었다. 충북은 0.04% 올라 상승세를 유지했지만, 전주(0.07%)보다 오름폭이 0.03%포인트 축소됐다. 충남은 -0.03%를 기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국군의 날 기념행사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국군의 날 기념행사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 안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뀐 무궁화호 안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뀐 무궁화호

  • ‘대전시는 수소트램 원점 재검토하라’ ‘대전시는 수소트램 원점 재검토하라’

  • 금빛으로 빛난 대전의 영웅들 금빛으로 빛난 대전의 영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