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해묵은 인사

  • 오피니언
  • 프리즘

[프리즘] 해묵은 인사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승인 2021-02-02 08:20
  • 신가람 기자신가람 기자
을지대 간호대학장 임숙빈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이십여 년 살던 집을 정리하는 일이 몇 년 만에 문득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비롯됐다. "저 000이에요, 기억하세요? 아직 00아파트에 사세요? 여기 좋네요." 필자가 사는 동네에 놀러 왔던 지인의 관심은 두어 달 후 집구경으로 이어졌고, 결국 매매가 성사되기까지에 이르렀다.

조용하고 공기 좋고 전망 또한 좋은 것은 잠깐 사이에도 알 수 있는 강점이지만, 오래전에 지은 아파트이고, 도로 폭이 넓지 않고 작은 상점들로 빼곡한 진입로는 어수선한 느낌을 줄만도 한데 해외에서도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지인에게는 오히려 정겨움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가 반대한다고 했다. 투자 가치가 적다는 것인데, 대전 전체가 조정지역이 되는 상황에서도 억울한 마음이 들 만큼 집값은 오르지 않아 필자 역시 이미 밝혔던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니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마도 긴 시간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집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전혀 모르는 사람과 거래하는 게 더 마음 편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 그 지인이 집을 사겠다는 결정을 알려와 그 이후는 일사천리로 계약을 마쳤다. 서로의 사정을 고려해 이사하는 시점을 여유롭게 정한 후부터 필자의 해묵은 인사는 시작됐다. 지도도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동네 모퉁이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반찬가게 지나 문구점, 그 앞에서 좌회전으로 몸을 틀면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 거기를 끼고 돌면 나타나는 과일가게, 아파트 입구 앞 정육점과 24시간 편의점, 등. 코로나 때문에 최근에는 아주머니들의 야채 난전까지 눈에 담겼다. 물론 간간이 다니던 음식점의 좋아하던 메뉴도 마지막으로 먹어보고, 평상시 이야기라도 나눈 사람들에게는 짧은 작별 인사도 건넬 수 있었다. 단골로 다니던 미용실 원장님이나 차량정비 소장님께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러다 보니 미국 연수에서 경험했던 소아정신과의 'Last 30 minutes'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에 입원했던 아동이나 청소년들의 퇴원이 결정되면 그때부터 퇴원하는 날까지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해 근무자들이 퇴원할 환자와 다양한 형태로 각각 '마지막 30분'을 가지는 것이었다.

간식이나 음료를 함께 나누며 입원해있는 동안 함께 한 경험을 추억하기도 하고, 치료 후 달라진 점을 재인식시켜주며 퇴원 후 생활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매우 인상적으로 느꼈던지라 귀국 후 국내에서도 간호팀을 중심으로 시도했지만 입·퇴원 결정 시스템 등의 차이로 부분적으로만 할 수 있었던 기억이다.

여하간 나름대로 오래도록 익숙했던 것들과 마지막 몇 분을 쓰는 것은 떠나는 섭섭함을 달래고 얽혀 살던 관계를 정리하는 데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옛날식으로 해보려 마음먹고, 이사하는 날 나누어 먹으려고 떡을 주문하고 찾으러 갔는데 마침 바로 옆집이 한때 자주 다니던 옷 수선 재롱이네였다.

최근에는 가지 않았더니 이미 떠난 줄 알았다며 이사 간다고 들러주어서 감동이라고 했다. 내일 해주겠다고 말한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고 번번이 미안해하지만 두 자녀를 키우며 억척스럽게 사는 분이었는데, 잠깐의 인사로 감동했다니 이 또한 서로 얽혀 사는 따뜻한 모습 아니겠는가.

그렇게 동네 인사는 이리저리 일상을 이용해 나눌 수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인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찾아뵈어야 할 분들에 대한 인사는 코로나 장벽에 막힌 채 어찌할 수 없어, 카드를 한 묶음 챙겨왔다. 아쉽지만 편지로 섣달그믐 묵은세배를 드려야 하려나 보다. 그리고 집 앞 숲에 살던 새들과는 꿈속에서나 인사 나누고…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오인철 충남도의원, 2025 대한민국 지방자치평가 의정정책대상 수상
  2. 위기브, ‘끊김 없는 고향사랑기부’ 위한 사전예약… "선의가 멈추지 않도록"
  3. '방학 땐 교사 없이 오롯이…' 파업 나선 대전 유치원 방과후과정 전담사 처우 수면 위로
  4. 국제라이온스협회 356-B지구 강도묵 전 총재 사랑의 밥차 급식 봉사
  5. 제1회 국제파크골프연합회장배 스크린파크골프대회 성료
  1. 대전사랑메세나·동안미소한의원, 연말연시 자선 영화제 성황리 개최
  2. 육상 꿈나무들 힘찬 도약 응원
  3. [독자칼럼]대전시 외국인정책에 대한 다섯 가지 제언
  4. 정부 유류세 인하조치 이달 말 종료 "기름 가득 채우세요"
  5. [2025 충남 안전골든벨 왕중왕전] 전형식 충남도 정무부지사 "안전지식 체득하는 시간되길"

헤드라인 뉴스


[지방자치 30년, 다음을 묻다] 대전·충남 통합 `벼랑끝 지방` 구원투수 될까

[지방자치 30년, 다음을 묻다] 대전·충남 통합 '벼랑끝 지방' 구원투수 될까

지방자치 30년은 성과와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 시간이다. 주민과 가까운 행정은 자리 잡았지만, 지역이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구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제도는 커졌지만 지방의 선택지는 오히려 좁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인구 감소와 재정 압박, 수도권 일극 구조가 겹치며 지방자치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의 자치 체계가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 아니면 구조 자체를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인지에 대한 질문이 커지고 있다. 2026년은 지방자치 30년을 지나 민선 9기를 앞둔 해다. 이제는 제도의 확대가..

대전 충남 통합 내년 지방선거 뇌관되나
대전 충남 통합 내년 지방선거 뇌관되나

대전 충남 통합이 지역 의제로선 매우 이례적으로 정국 현안으로 떠오른 가운데 내년 지방선거 뇌관으로 까지 부상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정부 여당이 강력 드라이브를 걸면서 보수 야당은 여당 발(發) 이슈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원심력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6월 통합 단체장 선출이 유력한데 기존 대전시장과 충남지사를 준비하던 여야 정치인들의 교통 정리 때 진통이 불가피한 것도 부담이다. 정치권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8일 대전 충남 민주당 의원들과 오찬에서 행정통합에 대해 지원사격을 하면서 정치권이 긴박하게 움직이..

정부, 카페 일회용 컵 따로 계산제 추진에 대전 자영업자 우려 목소리
정부, 카페 일회용 컵 따로 계산제 추진에 대전 자영업자 우려 목소리

정부가 카페 등에서 일회용 컵값을 따로 받는 '컵 따로 계산제' 방안을 추진하자 카페 자영업자들의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매장 내에서 사용하는 다회용 머그잔과 테이크아웃 일회용 컵 가격을 각각 분리한다는 게 핵심인데, 제도 시행 시 소비자들은 일회용 컵 선택 시 일정 부분 돈을 내야 한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2026년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2027년부터 카페 등에서 일회용 컵 무상 제공을 금지할 계획이다.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최근 대통령 업무 보고에서 컵 따로 계산제를 탈 플라스틱 종합 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 신나는 스케이트 신나는 스케이트

  • 성금으로 잇는 희망…유성구 주민들 ‘순회모금’ 동참 성금으로 잇는 희망…유성구 주민들 ‘순회모금’ 동참

  • 시니어 모델들의 우아한 워킹 시니어 모델들의 우아한 워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