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뻔한 유죄 추정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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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광장] 뻔한 유죄 추정의 원칙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 승인 2021-12-22 08:37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신기용
신기용 변호사
공판 검사 시절 담당했던 사건이다. 피해 금액 몇천 원 정도의 아주 소액의 절도 사건이었다. 약식명령으로 경미한 벌금이 선고되었지만, 피고인은 돈을 훔친 사실이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증거기록의 내용은 이렇다. 가게를 운영하던 피해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돈이 없어져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주변에 있던 방범용 CCTV를 확인한 결과, 피해 시간대에 그 장소를 지나간 사람은 피고인밖에 없었음을 확인했다. CCTV가 유력한 증거가 돼 기소가 이뤄졌다.



사실 누가 봐도 '뻔한' 사건이었다. 피고인은 수법도 별다를 것이 없는 절도 전과도 있었다. 이미 약식명령이 선고된 사건은 무죄를 주장하더라도 형이 더 중해지지는 않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 식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뻔해 보였다.

하지만 판사의 판단은 달랐다. 증거로 제시된 방범용 CCTV는 짧은 시간 간격으로 서로 다른 장소를 비추는 방식으로 촬영됐는데 하필 피고인이 피해 가게를 지나갈 무렵에는 다른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물론 시간대를 고려했을 때 피고인이 가게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으로 추정되기는 했다. 하지만 설령 피고인이 가게에 들어갔었다고 하더라도 돈을 훔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취지로 무죄가 선고됐다.



어찌 보면 당연한 판결이다. 가게 주인이 돈을 잃어버리고는 홧김에 신고했는데 마침 그 시간에 피고인이 지나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피고인이 아닌 누군가 가게에 들어갔다가 또 CCTV가 다른 곳을 비추는 동안 가게에서 빠져나왔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기억에 남는 것은 검사로서 입증의 정도에 대해 타성에 젖어들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과중한 사건 부담 속에 수사력은 한계가 있기에 어느 정도 혐의가 추정된다면 명백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기소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우리 사법시스템에서는 불가피한 일이 아닐까'라는 어쩌면 책임회피 식의 생각도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검사로서 무엇보다 무겁고 소중하게 짊어져야 할 명제를 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판사는 여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는데 나중에는 판사가 직접 '이렇게 항소를 포기해도 괜찮은 거냐'라고 걱정할 정도로 항소를 포기했다. 무죄가 선고되면 검사는 거의 자동적으로 항소를 하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진다. 그래도 일일이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어렵게 부장검사를 설득하면서까지 항소를 포기했던 건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채찍질 같은 것이었다.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검사의 책임이나 체면 같은 것에 얽매여 피고인을 또다시 법정에 세우는 잘못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 대전지방법원에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판사가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어찌 이런 조사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착잡할 따름"이라고 개탄한 사례가 보도됐다. 경찰이 혐의를 부인하는 피의자에게 '피의자가 뺑소니하지 않았다고 객관적으로 입증할 증거나 증인이 있느냐'라고 물은 것이 무죄추정 원칙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쉽게 피의자의 혐의를 단정 짓고 혐의가 없다는 증거를 가져와 보란 식의 수사가 진행되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라도 그런 문제에 대해 신랄한 지적이 있었다는 점은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변호사가 되고 나서 더욱 체감하는 건 객관적이고 면밀한 증거보다 소위 '관심법'이라는, 사법기관의 심증이 우선되는 일이 생각보다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딱 보면 '뻔'하지 않느냐는 식이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량을 이유나 사법 시스템의 한계를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너무도 쉽게 짓밟아지고 있다.

'유죄추정의 원칙', '의심스러울 때는 검사의 이익으로'라는 말들이 회자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범죄자를 벌하는 것보다 무고한 자를 벌하지 않는 것이 정의에 더욱 가깝다./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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