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조정실에 비친 판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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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시평] 조정실에 비친 판사의 모습

  • 승인 2024-05-07 16:25
  • 신문게재 2024-05-08 18면
  • 김흥수 기자김흥수 기자
손종학 교수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법조인 출신의 대학교수로 생활하면서 언제부턴가 사법부가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이곳저곳에서 심심치 않게 듣는다. 아마도 위기의 근원점은 사법부의 신뢰상실일 것이다. 너무도 억울할 때, 그럼에도 그 누구 하나 내 진실을 믿어주지 않을 때, 그래도 나를 지켜줄 곳, 내가 믿을 곳은 법원밖에 없다는 낭떠러지에 난 풀 한 포기에 의지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법원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마냥 지연되기만 하는 재판에 과연 권리구제를 받기나 할 것인지 모르겠기에 불만과 초조함이 인다. 그리고 어찌저찌하여 늦게나마 재판이 마쳐지기라도 할라치면 과연 담당 판사가 내 기록을 제대로 파악하긴 한 것인지 의문을 품으면서 권리구제는 고사하고 혹시라도 결론이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불신감과 기우가 엄습한다. 이어서 주변에서 들은 것처럼 판사의 정치 성향이 너무도 강해 법률적 접근이 아닌 정치적 고려에 따라 사건을 처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안타깝게도 재판받는 시민들의 이러한 감정들이 법원 청사 하늘에 드리워져 있고, 이는 사법 불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종국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보장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기능해야 할 법원이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해 위기에 빠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이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고, 법원은 시민의 신뢰와 사랑을 언제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그 누구 있어 쉬이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주제이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흔히 근대 소송의 이상이라 일컬어지는 신속한 재판, 공평과 적정을 갖춘 재판, 경제적 재판만이 위기 극복의 출발점이자 가장 강력한 치유책이리라.

그러나 시민사회가 성숙하고, 권위주의가 물러나며 다양성과 전문성이 강조되는 21세기에서는 이러한 기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과 각종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와 지식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막연히 우리 사회에 존재해 온, 그러나 결코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도 없는 관념인 '법관과 재판은 옳다'는 교조적 권위는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러니 답답할 뿐이다. 생각해보자 신속과 적정한 재판은 그 자체로 양립 불가할 듯한 용어인데 이를 어떻게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재판의 이상만을 좇기에도 벅찬데,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니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낭패감 속에 자조 섞인 한숨만 나온다.

게다가 법조계에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회자되는, 그래서 전혀 사실 같지 않은 낯선 법조 풍경, 즉 한 주에 몇 건 이상은 판결서를 쓰지 않겠다, 재판 도중이라도 오후 6시가 되면 재판 진행을 하지 않겠다는 등의 신세대 판사들의 워라밸 추구 세태를 듣노라면,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얼마 전이다. 재판부의 요청을 받고 민사조정에 참여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약간은 낯설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조정실을 법원 청사 1층에 모아놓고 나름 새롭게 인테리어 공사를 한 듯한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을 무렵, 재판장이 들어왔다.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다른 조정위원 한 분과 함께 셋이서 사건 처리를 위한 의견을 교환한 후 묻는다. "위원님, 혹시 커피 좋아하시는지요? 아니면 좋아하시는 다른 음료가 있는지요?" 큰 의미 없이 답했다. 커피를 좋아한다고. 재판장은 나갔고, 잠시 후 조정실 문이 열리면서 두 손에 커피를 든 모습이 보였다. 조정하느라 힘들 터인데 커피 마셔가며 하시라는 말을 남기곤 다시 나갔다.

순간 문화적, 관행적 충격을 받았다. 법조 생활 나름 수십 년에 조정위원만으로도 근 20년이 되는데, 법원에서 처음 받는 환대였다.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다는 마음에 나름 더욱 기분 좋게 열심히 조정에 임했다. 그리곤 이어지는 생각 하나가 일었다. '어쩌면 저 판사님의 자세와 인품에서 사법부 위기 극복을 위한 작은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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