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칼럼]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 오피니언
  • 문화人 칼럼

[문화人칼럼]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 창작학과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4-07-10 17:06
  • 수정 2024-07-10 18:40
  • 신문게재 2024-07-11 19면
  • 한은비 기자한은비 기자
김홍진 교수
김홍진 교수.
고형렬 시선집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창비)를 읽었다. 당연히 이 선집에는 첫 시집 표제작 「대청봉 수박밭」이 실려 있다. 20대 초반 끔찍했던 시절 이 시집을 읽은 기억은 아직도 강렬하다. 그 기억은 "아, 이렇게도 현실원칙을 교란할 수 있구나" 하는 위반의 쾌감 같은 데서 오는 것이었다. 자끄 랑시에르에 따르면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의식이나 메시지를 통해 생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감각의 분배 체계를 교란하고 재배열하는 미적 기능과 효과에서 온다.

고형렬은 "청봉이 어디인지,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면 이 여름밤"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이 있는 대청봉으로 함께 가자고 잡아끈다. 설악산 대청봉엔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그곳엔 또 수박밭이 있다. 이 진술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허무맹랑한 진술이 거짓말 같지 않은 이유는 "상상을 알고 있지"와 "상상력을 걷는다"는 진술 때문이다. 여름밤 대청봉에 눈이 내리고 수박밭이 있다는 진술은 우리의 일상적 감각과 인식 체계를 교란 전복함으로써 심미적 정치성을 발생시킨다.

상상은 일상의 문법을 해체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힘이다. 시인은 뜬금없이 한여름 대청봉에 눈이 펑펑 내린다는 둥, 그곳에는 수박밭이 있다는 둥 너스레를 떨다가 갑자기 그곳이 '백두산'이었으면 상상한다. 그리하여 꿈이나 달 같은 수박, '기막힌 수박만 한 눈송이'가 무엇을 환유하는지 부연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삭정이 뼈처럼 죽어 있던 골짜기"로 은유한 폐색된 현실이 가로막은 꿈의 금지된 땅으로 월경(越境)을 감행해 유영을 즐긴다. 그리하여 이 상상의 유영은 우리의 모순적 현실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다.

고형렬의 많은 시가 보여주는 상상의 월경은 현실의 검열과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하는 문학적 위장으로 기능한다. 분단 이후 현실이 호명을 금지하는 곳으로의 월경은 따라서 제도나 권력 기구 등이 표상하는 단일한 질서와 고착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탈중심성으로의 확장을 환기한다. 그는 경계를 떠도는, 그의 말대로 분열증상 혹은 미도착 상태에 있다. 이런 그에게 정치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제도적 폭력의 현실이 금지된 영역으로의 월경을 감행하게 만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초현실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은 야전병원에서 한 병사를 만난다. 이 병사는 전쟁을 현실이 아닌 허구라 믿는 친구다. 그런 탓에 포탄이 떨어지면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마구 뛰어다니길 즐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멀쩡했다. 이게 전쟁은 허구라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전쟁을 상상의 허구로 믿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쇼크로 죽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그가 현실을 부정하고 상상의 세계로 도피한 것은 참혹한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였다.

고형렬이 보여주는 월경의 상상 역시 브르통이 관찰한 병사에서 보듯 억압적 현실의 부정적 징후인 동시에 그 상태로부터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이고, 또 그 부정적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고형렬의 허구적 상상은 부정한 현실이 주는 스트레스, 특히 우리의 근대가 충격한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브르통이 병사의 광기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본 것처럼 고형렬은 월경을 통해 해방의 가능성을 보았다. 고형렬의 허구적 상상은 우리 근대사가 전개한 파행적 상황의 정직한 증언이자, 그 상황에서도 삶을 유지하려는 처절한 생존 의지이자 윤리이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 창작학과 교수·문학평론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타임월드 매각 검토에 둔산 상권 촉각…백화점 유지 변수
  2. 대전 한전 전력연구원 ESS 화재…배터리팩 28개 전소
  3. 행정수도 온통대전 충청 밥상머리 민심 관통 전망
  4. 타임월드 매각 검토에 고용 불안…노조 “안정 보장하라”
  5. 최재근 일자리진흥원장과 전용석 대전신보재단 이사장 각각 임명
  1. 대전시 지역 첫 방산 소부장 특화단지... 'AX 클러스터' 시정동력 탄력
  2. 허태정 "트램 흔들림 없이 추진" 정상 추진의지 밝혀
  3. 충남 천안·아산 7개 산업단지, 반도체 후공정 특화단지 지정
  4. 중부권 최대 민속놀이 대축제…제36회 충남도지사배 민속대제전 성료
  5. 석 달 파행 끝낼까…대덕구의회 21일 의장단 선출

헤드라인 뉴스


전국 유일 `식물의회` 대덕구의회 의장 선출 또 무산

전국 유일 '식물의회' 대덕구의회 의장 선출 또 무산

석 달째 '감투 싸움'으로 개점휴업 상태인 대전 대덕구의회가 21일 임시회를 열고 다시 의장 선출에 나섰으나 여야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또다시 무산됐다. 전국 227개 기초의회 가운데 아직까지 원 구성을 마무리하지 못한 곳은 대덕구의회가 유일하다. 민생 현안은 뒷전인 채 의장 자리를 둘러싼 여야 대치가 장기화하면서 주민들이 의회에 근조화환을 보내는 등 지역사회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21일 중도일보 취재결과, 대덕구의회는 이날 오전 제295회 임시회를 열고 전반기 의장 선출을 위한 표결을 진행했으나 단독 후보로 등록한 서미경..

저축성예금 50조원 목전 둔 대전... 은행권 예금 금리 경쟁에 더 오를까
저축성예금 50조원 목전 둔 대전... 은행권 예금 금리 경쟁에 더 오를까

주요 시중은행이 앞다퉈 정기예금 금리를 올리며 금융소비자 모시기에 나서면서 50조 원을 목전에 둔 대전 예금은행 저축성예금 수신 잔액도 크게 오를 전망이다. 최근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은행들이 수신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는데, 정기예금 금리를 3% 중반까지 올리고 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이날부터 대표적인 정기예금 상품 금리를 0.1%포인트 올렸다. 지난 14일 같은 상품 금리를 최고 0.6%포인트 올린 이후 일주일 만에 추가 인상이다. 이에 따라 1년 이상 2년 미만 만기 예금 금리는 연 3.4%에서 3.5%로 올..

충청권 AI활용 발전비전 전력공급 원활한 확보 시급… 화력발전 의존 장래에 불리
충청권 AI활용 발전비전 전력공급 원활한 확보 시급… 화력발전 의존 장래에 불리

충청권 지자체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방산·바이오·반도체 산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 AI 데이터센터에 투자하고 있지만, 필요한 전력 확보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충청권은 석탄화력발전 의존도가 높은 데다 송전망과 무탄소 전원 여력이 충분하지 않아 향후 데이터센터가 본격 가동되면 전력 공급에 병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21일 한국전력 대전충남본부와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대전·세종·충남·충북이 AI를 활용한 성장전략에 집중하면서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고 있으나 전력공급이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지방의회법 제정을 촉구한다’ ‘지방의회법 제정을 촉구한다’

  • 미리 보는 2026 지상군페스티벌…유·무인 복합전투체계 실전 시현 미리 보는 2026 지상군페스티벌…유·무인 복합전투체계 실전 시현

  • ‘풍요로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풍요로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 차례상 차리기 배우는 어린이들 차례상 차리기 배우는 어린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