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 오피니언
  • 세상읽기

[세상읽기]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황미란 지방부장

  • 승인 2026-02-04 09:44
  • 수정 2026-02-04 10:45
  • 신문게재 2026-02-05 18면
  • 황미란 기자황미란 기자
내사진-칼럼
황미란 지방부장
어릴 땐 '사실'이면 뭐든 말해도 되는 줄 알았다. '거짓말 하지 않으면 착한 아이'라는 말을 공식처럼 배웠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등학교 교실은 지금보다 훨씬 솔직한 공간이었다. 아이들의 입은 생각보다 빠르고 가벼웠다. 그날의 사건은 사회시간에 일어났다. 대가족과 핵가족을 배우던 중, 선생님이 물으셨다. "우리 반에 누가 형제가 가장 많지?" 누군가 옆집 ○○이를 가리켰다. "쟤네는 9남매래요." 순간 교실이 술렁였다. 아들 하나에 딸 여덟이라는 말이 이어졌고, 나는 괜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언니 셋은 같은 공장 다닌대요." 사실이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 말을 내뱉은 데에는 부러움이 컸다. 3남매의 맏이였던 나는, 철마다 언니들이 챙겨주는 새 옷을 입고 학용품을 쓰는 그 친구가 꽤나 부러웠다. 그래서 칭찬 비슷한 마음으로, 괜히 아는 체를 한 셈이었다.



훗날 중학생이 되어 그 친구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9남매라는 사실도 부끄러웠는데, 언니 셋이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 다닌다는 이야기까지 교실 안에 퍼져버린 게 너무 싫었다고 했다. 아이들의 수군거림보다 더 속상했던 건, 그 이야기가 그 친구 부모님에게는 평생의 한이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제서야 알았다. 사실이라고 해서 언제나 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입밖으로 나간 사실은 누군가의 평가가 되고, 오랜시간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문제는 어른이 된 지금, 그 '사실의 발설'이 때로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이른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존재해 온 이 조항은 개인의 명예를 중시하던 시대적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리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법의 현실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양육비 미지급 부모의 신상을 공개한 '배드파더스' 사건이다.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서도 법적 책임을 외면한 부모의 실명을 공개한 행위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24년, 해당 행위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적 제재'에 해당한다며 벌금 100만 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확정했다. 사회적 분노와 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이 선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형법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재판에서 공익성이 인정되는 일은 쉽지 않다. 양육비 미지급 문제뿐 아니라 미투 운동, 학교폭력 고발 과정에서도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했다가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일이 반복돼 왔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말이 충분히 보호받기 어려운 구조다.

해외의 사례는 다르다. 많은 나라가 명예훼손 문제를 형사처벌이 아닌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다루고, 그마저도 허위사실에 한정한다. 영국은 2010년 형사 명예훼손죄를 폐지했고, 독일과 일본 역시 사실이 진실이거나 공익적 발언으로 인정될 경우 대부분 면책된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한국에 반복적으로 법 개정을 권고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 무슨 명예훼손인가. 민사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폐지 검토를 지시한 것도 이런 오랜 논쟁의 연장선이다.

물론 폐지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병역 문제나 성적 지향, 가정사 같은 민감한 개인사가 무분별하게 공개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2021년 "한번 훼손된 명예는 회복하기 어렵다"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돌이켜보면 그날 내가 했던 말은 완전히 틀렸다고도, 온전히 옳다고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언어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는 그 사실의 공표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법으로 묻고 있다. 말해야 할 사실과 말하지 말아야 할 사실의 경계는, 지금도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방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박정현, 문평동 화재에 "현장 상황 철저히 확인 중"
  2. [대전 화재]진화율 80% 붕괴위험에 내부진입은 아직
  3. [속보] 대전 문평동 자동차 부품공장 화재, 부상자 다수 발생(영상포함)
  4. 대덕구노인종합복지관 노년사회화교육
  5. [대전 화재]경추골절·연기흡입 2명 중환자실…김민석 총리 "안전한 구조활동"당부
  1. [현장취재]대전크리스찬리더스클럽 정례예배
  2. 與 "대전 공장 화재 정부와 협력 인명 구조 당력 집중"
  3. 세종 문화예술지원사업 심사 두고… "불공정" VS "공정" 충돌
  4. 민주, "선거前 통합 어려워" 대전시장 충남지사 3인경선
  5. 화재발생 업체는 엔진밸브 생산 전문기업…국가소방 총동원령

헤드라인 뉴스


[대전 화재]남자화장실에서 사망자 1명 추가 수습…검·경 전담팀 수사

[대전 화재]남자화장실에서 사망자 1명 추가 수습…검·경 전담팀 수사

대전 대덕구 문평동 자동차 부품제조공장 화재 현장에 대해 관계기관이 합동감식을 시작하고 전담수사팀을 통해 본격 원인 규명에 나선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21일 경찰·소방·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 12명을 문평동 공장 화재 현장에 투입해 발화 지점으로 추정되는 구역을 중심으로 1차 감식을 한다고 전했다. 전날 오후 1시 17분께 시작된 불은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이는 검고 높게 치솟은 연기를 뿜으며 큰불로 번졌으며, 이후 10시간 30분가량이 지난 이날 오후 11시 48분께 완전히 진화됐다. 이번 화재로 현재까지 사망자 11명과 부상..

여야 대표 대전 문평동 화재 현장 방문…“가능한 모든 지원” 약속
여야 대표 대전 문평동 화재 현장 방문…“가능한 모든 지원” 약속

대전 대덕구 문평동 공장 화재 참사로 다수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한 가운데 여야 당대표가 잇따라 현장을 찾아 수습과 지원을 약속했다. 21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전날 발생한 화재 현장을 각각 방문해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이날 오전 문평동 사고 현장을 찾아 "안타깝게 희생된 분들과 유가족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재난 없는 안전한 나라를 강조해왔는데 이런 사고가 또 발생해 집권 여당 대표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이어..

천안시, `이동식 불법중개` 지도·단속 나서
천안시, '이동식 불법중개' 지도·단속 나서

천안시가 27일까지 '천안 아이파크시티 5·6단지'의 정당계약을 앞두고 이동식 불법중개(떳다방)를 집중 지도·단속한다고 밝혔다. 시는 서북구, 동남구, 아산시,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천안시지회와 합동으로 불법 부동산 중개 행위를 단속할 예정이다. 중점 지도·단속 사항은 무등록 중개업소 및 무자격 중개행위, 천막 등 임시중개시설물 설치, 중개보조원의 중개행위 및 고용 미신고, 분양권 거래 양도소득 신고 등이다. 시 관계자는 "이번 아이파크시티 5·6단지 외에도 꾸준히 정당계약을 앞둔 부동산을 대상으로 단속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수질환경과 토종어류의 보존을 위한 토종물고기 치어 방류 수질환경과 토종어류의 보존을 위한 토종물고기 치어 방류

  • 제20회 공주금강배 전국풋살대회 초등 3-4학년부 결승…천안라이온스 우승 제20회 공주금강배 전국풋살대회 초등 3-4학년부 결승…천안라이온스 우승

  • 제20회 공주금강배 전국풋살대회 일반여자부 예선 제20회 공주금강배 전국풋살대회 일반여자부 예선

  •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앞두고 투표지 분류기 운영 실습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앞두고 투표지 분류기 운영 실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