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보다 더 아프고 슬픔보다 더 슬퍼서
짠 맛든 눈물 몇 방울 칵테일로 대작하네
연기에 쓰는 비문 달에나 세우노니
달을 안고 가는 강물 목이 쉬어 암전이네
자네 한(恨) 녹여서 지은 종소리를 듣겠네
거느린 물안개가 사라지면 어쩔건가
윤슬에 남은 얼굴 선연하게 만나리니
먼저 가 기다리시게 꽃자리를 잡아놓게.
인생은 만남일 뿐 이별이 어딨는가
숨었다 다시 만나 해탈을 이룸일세
꽃자리 앉았다 가면 또 꽃자리 있으리.
< 6. 21. 아침 시조와 수필 >
지난 3년에 걸쳐 한권의 단시조 집을 엮기 위하여 열정을 다 태워서 겨우 66편의 단시조를 추려 시조집 ' 이슬 소반'을 상재하고 틈틈이 나눠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쁘게 나눠주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요 며칠 극심한 고독에 빠졌다. 이 책을 받는 분들이 과연 반가와 하고 나의 작품들을 따뜻이 읽어줄까? 나의 분신과도 같은 정성으로 드리는 줄 아랑곳없이 던져놨다가 버림받는 책이 되지는 않을까? 내가 괜히 책을 만든 것은 아닌가? 이 책들을 안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도 책도 똑같이 외로운 방랑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난데없이 쓸쓸하고 슬픈 마음이 회오리치기 시작 하였다. 만남이 그리워서……
나이 드니 친구가 세상을 떠나는 충격적인 소식이 간간이 전해온다.
조금 먼저 가서 기다려라. 만남을 위한 이별이다. 나는 좀 더 만나고 널 만나러 가리라. 영원한 이별은 없다. 새로운 만남을 예비하는 것이다.
그래 또 만나자. 만남이 삶이다. 어제는 두 단체의 모임이 있었는데 몇 권의 책을 들고 참석하였다. 점심은 시청에 근무하던 동갑네 모임 참솔회 인데 오늘은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날이라서 세종시 고복저수지 도가네 매운탕에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열리자마자 중도일보에 나의 신간 발간소식 기사를 읽고 책 발간 축하박수를 받았다. 고적하던 마음 한 자락에 위로의 물결이 적셔왔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집에 왔다가 잠시 후 저녁모임에 나가면서 또 책 몇권을 준비해 갔다. 반창회 모임으로 7~8명이 매달 만나는 모임이다. 여기서도 박수를 받고 만남의 의미로 마음이 흔들림을 실감했다.
오늘은 아내의 형제들과 동서들이 매주 토요일을 기다리는데 어제 내 모임으로 인해서 기다리게 한지라 점심을 같이하려고 성당에는 새벽미사를 보기 위해 일찍 나갔다. 성당에서 줄곧 만남과 삶에 대하여 생각했다.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만나고, 성사를 만나고, 기독 신앙을 만나는 모든 것이 만남임을 새롭게 생각했다. 만남은 성경이나 불경과 시나 노래와 끝없는 자연과 영원한 영혼의 세계와도 경계 없이 이루어진다. 삶은 영원한 인연법으로 이어진다.
신부님의 강론에서 오늘은 특별한 감동을 받았다. 참으로 절절한 만남을 가진 것이다. 바로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와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 최방제 세 사람은 1837년 중국의 마카오에 가서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최양업은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가 된 분이다.
최양업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순교자 이존창 루드비코 곤자가의 집안사람이고 17세에 수리산 교우촌(지금의 안양)을 이끌며 초대회장을 지내던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다섯 아들을 낳았는게 그 첫째가 최양업이다. 이성례 마리아는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나머지 네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가 조선의 천주교인 박해가 한창이던 1839년 기해박해에 잡혀가 아이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런데 조선의 법에 아이들과 함께 투옥되는데 대한 규정이 없어서 가두기는 하였지만 아이들의 급식이 나오지 않았다 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자신의 밥을 아이들을 먹이고 자신은 굶었기에 3살 난 젖먹이가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지만 젖이 나오지 않자 젖을 문채 죽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이성례 마리아는 그만 천주학을 믿지 않겠다고 소리치고 아이들과 함께 옥에서 풀려났다 한다. 나왔지만 이미 재산을 다 몰수당하고 천주학쟁이라는 사회적 경계심으로 구걸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이들만 구걸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양업이 마카오에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말았다. 마리아는 이제 다시는 배교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옥살이의 온갖 고문을 다 이겨내고 끝내는 참형을 당하게 결정되었다. 이성례 마리아는 태장 340대를 맞고 곤장 110대를 맞고도 굽히지 않고 다음날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아이들에게 "너희들을 절대로 흩어지지 말고 함께 너희 형(최양업)을 기다리라 하고 내가 참형을 당하는 현장에는 절대로 오지 말아라"하고 당부하였다.
아이들은 나오자마자 내일 형장에서 참형을 집행할 망나니를 찾아가 그동안 동냥하여 모은 곡식꾸러미를 내놓고는 엎드려 울면서 "내일 어머니를 한 칼에 목을 쳐서 고통을 덜 느끼고 하늘나라고 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망나니는 그 광경이 너무 처절해서 "알았다" 하고 밤새도록 칼을 갈아 날카롭게 해가지고 형장에 나갔다. 이성례 마리아 앞에 당도했을 때 아이들은 멀리서 지켜보다가 크게 소리치자 망나니는 그가 아이들의 어미인 것을 알고 단칼에 목을 쳐서 하늘나라로 보내주었다 한다. 당시 천주교인들을 죽일 때는 녹슨 칼로 일부러 여러 번 목을 쳐서 최악의 고통을 받게 하였다 한다.
최양업 신부는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정세가 불안정하여 늦게 1849년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850년부터 조선에서 진천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천안 이남 충청, 전라, 경상지역 127개 공소를 도보로 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였고 울산의 죽림굴에서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기진맥진하여 1861년 세상을 떠났다. 최양업 신부는 순교자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겨 103위 성인 선정 자료로 소중하게 활용되었다. 글 가운데는 사향가(思鄕歌), 하주삼덕가(何主三德歌), 칠성사가(七聖事歌)등 4?4조의 천주가사(天主歌辭) 번역서 『천주성교공과』를 남겼다.
2016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양업 신부를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존칭으로 가경자(加敬者 )로 선포하고 전구를 통해 기적이 일어남을 인정 시복을 결정하였으며, 이성례 마리아를 복자품에 올렸다. 1940년 당고개에서 39세를 일기로 순교한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사화」는 뮤지컬로도 제작되어 공연에 올려져 더욱 유명해졌으며 수리산 교우촌이 복원되면서 피정의 집 「성례 마리아의 집」이 마련되어 임의 성덕을 기리게 되었다.
오늘 아침 미사에서 나는 참으로 거룩하고 뜻 깊은 만남을 이루었다.
박헌오/한국시조협회 5대 이사장, 초대 대전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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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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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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