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성]정월, 편지를 열게 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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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성]정월, 편지를 열게 하는 용기

[중도춘추]이철성 건양대 군사경찰대학장

  • 승인 2012-01-26 14:59
  • 신문게재 2012-01-27 20면
  • 이철성 건양대 군사경찰대학장이철성 건양대 군사경찰대학장
▲ 이철성 건양대 군사경찰대학장
▲ 이철성 건양대 군사경찰대학장
신라 소지왕은 말을 탄 무사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이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떼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이때 날씨와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일관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서민(庶民)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이에 편지를 열게 하니 '거문고 상자를 쏴라'(射琴匣)라고 적혀 있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곧 궁중으로 돌아가 활로 거문고 상자를 쏘니, 그 안에 내전(內殿)에서 향을 올리며 수도하던 중과 궁주(宮主)가 몰래 통정하며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삼국유사』 '기이(奇異)'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나오는 유명한 이 이야기는 정월 초하루를 갓 지낸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왕은 편지를 받기까지 여러 가지 이상한 징조를 경험했다.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나가려 하자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며 길을 막았다. 그리고는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고 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기사가 까마귀를 뒤쫓아서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렀는데, 돼지 두 마리가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말을 탄 무사는 그것을 구경하다가 깜빡 까마귀를 놓치고 길가에서 방황했는데,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오면서 글을 전해 주었다. 그 글이 바로 왕에게 전달된 편지였다.

위기를 넘긴 왕은 고마움을 표현했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부터 열이틀까지 이어지는 십이지에 해당하는 열두 동물의 날 가운데, 쥐의 날인 상자일(上子日), 말의 날인 상오일(上午日), 돼지의 날인 상해일(上亥日)을 몸을 삼가고 마음을 살피는 기간으로 선포했다.

이상 징후를 알려 주려 했던 쥐, 까마귀, 돼지 그리고 편지를 전해준 어떤 노인은 신라의 전통을 지키려던 세력으로 해석된다. 당시 신라는 고유의 민간 신앙과 불교 사상이 서로 접촉하는 시기였다. 궁중에 향을 올리던 중이 등장하는 이유다.

정치세력도 이런 변화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의 변화는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모두 뒤바꿀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민간신앙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은 쥐, 까마귀, 돼지, 신비의 노인을 등장시켜 역모를 왕에게 알리려 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관이었다.

일관(日官, weather shaman)은 날씨를 예측하고 길일을 잡는 임무를 맡은 하급 관료였다. 그러나 고대 국가 형성 이전, 이들은 군장과 분리된 종교의 수장인 제사장이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사회 전체를 이끌던 샤먼이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한낱 미천한 관료로 떨어졌으나, 그는 세상의 변화를 이미 경험했고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왕에게 직언한 것이다. 편지를 열어 보라고 직언을 한 일관의 용기와 이를 받아들인 왕의 결단. 이는 일면 민간신앙에 바탕을 둔 정치세력과 외래 불교 이념으로 무장한 정치세력과의 진검 승부에서 전자의 승리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이 사건은 법흥왕의 불교 공인과 정치개혁의 와중에서도 신라가 민간 신앙을 아우르는 독특한 불교 사상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시대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은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옛 것과 새 것,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자연스런 현상이 됐다. 그리고 왕에게 직언했던 일관의 역할은 이제 국민 개개인의 의무이자 권리가 됐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둔 음력 정월을 맞으면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 옛날 어느 한 일관의 용기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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