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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운전사로 일하는 김만섭(송강호)은 딸 하나를 둔 홀아비다. 아내가 병으로 죽은 뒤 실의에 빠져 한동안 술로 살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딸이 아내의 옷을 입어보면서 엄마를 그리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고 술을 끊는다.
1980년의 5월의 어느 날, 외국 손님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 돌아오면 무려 10만 원을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다른 기사 몫을 채뜨리곤 공항으로 달려간다. 거기서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만나 광주로 가면서 영화는 더욱 흥미진진의 터널로 들어선다.
당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말미암아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죽거나 다쳐서 아수라장이었음에도 정부의 언론통제로 인해 국민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이에 기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보도할 작정으로 일본에서 입국한 것이었다.
나는 1980년 가을에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1982년에 전역했는데 군 복무 기간엔 물론이고 제대 후에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이는 그만큼 당시가 언론의 정부통제와 장악이 여전했었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37년 전에 일어났던 ‘광주의 비극’이란 대사건이 존재했기에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의 달콤한 과실을 먹을 수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우선 만섭이 기자와 함께 광주에서 1박을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딸을 그리워하는 대목에서였다. 고작 하룻밤의 타지(他地) ‘숙박’이긴 했으되 자신의 귀가를 기다릴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주변에서 ‘딸바보’라 놀리는 나의 경우와도 부합되는 때문이었다.
딸은 87년생이기에 1980년에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이 영화의 관람 내지 관련서적과 자료 등을 살펴보지 않는 이상엔 소상히 알 리 없다. 그랬음에도 이 영화를 보면서 딸을 새삼 그리워했던 건 나 또한 딸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한 때문이다.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더욱 세찬 가난의 쓰나미가 들이닥쳤다. 공부 잘 하는 딸의 학비마저 제 때 줄 수 없는 절대빈곤이 심신을 괴롭혔다. 천만다행으로 딸의 학교에선 딸이 전교 1등이라 하여 장학금에 이어 교육용 PC까지 집에 설치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다 시킨다는 사교육마저 그림의 떡이란 현실에서 자학의 홧술을 푸기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이의 상쇄 방안을 하나 찾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그건 바로 딸의 등‧하굣길 동반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딸의 손을 잡고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그러면서 뭐든 칭찬할만한 구실을 찾았다. “우리 딸, 오늘도 공부하느라 어려울 텐데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만 해. 우리 딸은 쉬엄쉬엄해도 늘 1등이니까.”
밤에 마중을 나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아빠가 떡볶이 맛나게 만들어줄까?” 고삭부리 아낙이 된 지금과 달리 당시엔 아내도 밖에 나가 돈을 벌었다.
늘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는 아내를 대신해 살림까지 했기에 나의 요리 실력은 아이들도 인정하는 터였다. 아무튼 그렇게 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거름 없이 배웅과 마중을 계속하며 나름 딸의 ‘수발’을 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랬던가, 딸은 수시모집으로 S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도 장학생으로. 딸이 프린터로 출력해준 S대학교 합격증을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 우리 딸 정말 장하다! 고맙다!! 그리고 아빠가 가난해서 미안하다!!!”
1980년의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7년 후인 1987년의 이른바 ‘6월 항쟁’엔 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치 못한 데 따른 미안함과 더불어 따지고 보면 나 또한 어엿한 민주시민이란 뒤늦은 자각에서 기인한 당연한 행동의 분출이었다고나 할까.
도청 앞과 중앙로 등지에서 소위 ‘넥타이 부대’로 시위에 참여하여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때 딸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불과 다섯 달 남짓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지독한 최루탄 냄새를 가득 안고 귀가하는 나를 꾸짖기도 일쑤였다.
“당신이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그러다가 경찰에 잡혀가면 우리 아들이랑 딸은 어쩔 껴?” “……” 아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국민들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소중한 민주화 역시 결코 국민들 것이 될 수 없음을 그때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는 결연한 선언까지 하셨을까. 혜은이는 <뛰뛰빵빵>이라는 가요에서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바람처럼 달려가자 ~ 뛰뛰뛰뛰 뛰뛰빵빵 뛰뛰뛰뛰 뛰뛰빵빵 ~”이라며 노래한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귀한 민주화, 그리고 언론과 SNS 등의 언로(言路)의 원활한 소통 역시 고속도로를 바람처럼 달려가듯 그렇게 민주화 쟁취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 아닐까.
택시도 경적을 울리면 마찬가지로 “뛰뛰빵빵 ~” 소리가 난다. 이어지는 <뛰뛰빵빵> 노래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이란 ‘가슴 쓰라린 어제 일들은’ 이제 깨끗하게 잊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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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