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새롬의 세상만사] '언노운 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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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롬의 세상만사] '언노운 걸'을 위하여

  • 승인 2018-02-28 12:07
  • 신문게재 2018-03-01 21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진료시간이 끝난 병원.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의사는 진료시간이 끝났으니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금 지나 퇴근했다.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 근처에서 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됐다며 폐쇄회로 TV를 보여 달라고 말한다. 어제 병원 문을 두드리고 간 사람은 바로 그 소녀였다. 만약 의사가 문을 열어줬다면 소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언노운 걸(The Unknown Girl)'의 서사는 여기서 출발한다. 내가 문을 열어줬다면 누군가 죽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도의적으로는 책임이 있지만 법적으로 죄를 물어야 할 일은 아니다. 당연히 죄책감을 느끼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여기서 멈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언노운 걸'의 주인공 의사 제니는 소녀에 대한 죄책감에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 한다.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소녀가 무연고 묘에 묻히게 되자 묘지에 찾아가고 경찰에게 수사 과정에서 소녀에 대해 밝혀진 사실이 있는지 확인한다. 휴대폰으로 CCTV 화면을 찍어서 환자들에게도 혹시 소녀를 본 적이 있는지 묻던 그녀는 점점 소녀가 누구였는지, 왜 죽게 됐는지 진실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제니는 대형병원으로 이직하려던 계획도 취소하고, 담당환자도 잃게 된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협박을 당하고 친했던 사람에게 폭언을 듣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데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한 행동을 책임지려는 의지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던 남성을 깨운 적이 한 번, 비슷한 상황에서 눈을 뜨지 않던 다른 남성을 위해서는 경찰에 신고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길에 누워 잠든 사람을 그냥 두고 갔다가는 분명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니처럼 그게 내가 해야할 책임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손해를 보지 않는 범위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푸는 건 생각보다 쉽다. 명예든 시간이든 자신에게 닥쳐올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벌어진 일을 책임지는 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녀의 용기 덕에 극 중 소녀의 가족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반성한다. 소녀를 방치한 또 다른 사람도 죄를 고백한다. 그녀가 소녀를 찾아다니지 않았다면 소녀의 죽음에 도의적 책임을 가진 그들은 평생 괴롭게 살았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을 보는 동안 모르는 척, 못 본 척 했던 일로 나중에 마음이 괴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처럼 남을 위해 선뜻 손해를 감수할 자신은 여전히 없었지만 영화 속 그들처럼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전의 나처럼, 영화 속 그들처럼 스스로 괴로워지지 말자고 검은 화면을 보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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