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철 지난 동백꽃에 홀리다- 서천 마량리 동백정

  • 전국

[여행과 산]철 지난 동백꽃에 홀리다- 서천 마량리 동백정

  • 승인 2018-04-06 09:00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180405_153321475
서천 마량리 동백정의 동백나무. 수령이 500년이나 된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 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이른 봄 남풍이 살랑살랑 불어오기 시작할 즈음, 시도 때도 없이 봄 노래를 흥얼거렸다. 웃음이 비질비질 비어져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몸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했다. 잠자던 몸의 세포가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겨우 내 빙하기를 연상케 하는 한파 때문에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었다. 집, 회사만 간신히 왔다갔다 하는 최소한의 목숨을 부지하는 힘든 나날이었다. 견딘다는 게 이런 거구나. 과연 봄이 올까, 나무들은 살아 있을까, 제비꽃은 피어날까. 쓸데없는 기우였다. 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봄이 온 것이다.

기찻길 옆은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개나리가 만발했다. 산 밑 마을은 살구꽃이 듬성듬성 수놓았고 어느 집 담장 아래는 수선화가 곱게 피었다. 서천으로 가는 길은 감회가 새로웠다. 오래전 초겨울, 20대 후반에 고등학교 친구가 서천에서 결혼한다고 해서 간 적이 있다. 난 신부 들러리를 서 주기로 했다. 그래서 친구와 그 남편 될 남자와 결혼식 전날 서천으로 갔다. 서천은 친구 남편의 고향이었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 먹고 과자도 먹으면서 한껏 나들이 기분을 냈지만 처음 보는 친구 남편 될 남자와 함께 있으려니 어색하기만 했다. 친구 남편도 숫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천이란 곳을 그때 처음 갔지만 별 기억이 없다. 단지 친구와 하룻밤 묵은 싸구려 여인숙과 경황 없는 결혼식이 희미하게 생각날 뿐이다. 알록달록 요란한 벽지 무늬와 오래된 집에서 나는 큼큼한 냄새에다 꼬질꼬질한 이불 때문인지 잠자리가 영 마뜩잖았다. 이 누추한 곳에서 어떤 인생들이 하룻밤 몸을 누이고 안식을 구했을까. 쓸쓸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나와 친구는 영락없이 갈 데 없는 이방인 신세 같았다. 친구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는 결혼이라고 고백했다. 남동생한테 주먹질을 당한 애인을 보며 자기가 책임져야겠다고 결심했단다. 친구는 훗날 의리가 밥 먹여 주는 세상이 아니더라며 한탄을 했다.

동백꽃은 통영이나 여수 등 남도에서 볼 수 있는 꽃이다. 앞산의 흔하디 흔한 소나무처럼 아랫지방은 동백나무가 그렇다. 그런데 뜬금없이 서천 마량리에 동백나무 군락이 있다. 서천은 동백꽃이 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속한다. 바닷가 가파른 언덕에 수령이 500년 된 수십 그루의 동백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오래된 동백나무는 구렁이가 꿈틀거리는 듯한 가지들이 얽히고설켜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짧지 않은 세월을 동백꽃은 피었다가 지는 행위를 제의처럼 반복했을 테다. 동백꽃은 노란 수술과 빨간 꽃잎의 화려한 꽃임에도 우리에게 슬픔의 정서를 준다. 봄이란 계절이 그런 것 같다. 어느 시인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하지 않았나. 삭막한 겨울 다음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화사한 자연 현상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지기 마련이다. 호르몬의 변화가 한 몫 하는 모양이다. 우울증이 봄에 많이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유 아닐까.



동백정 정상엔 당집이 있다. 시골이나 바닷가 마을에는 으레 서낭당이 있었다. 세상은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 많다. 옛날은 자연 재해에 더 취약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 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법은 정성껏 제를 올려 신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야 마을은 비로소 안녕하게 된다. 동백정이 탄생하기까지의 전설도 눈물겹다. 500년 전 마량리 마을 사내들은 바다로 고기잡이 하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어느날,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노파는 바다에서 용이 승천하는 걸 보고 용왕을 받들어야 화를 면한다는 걸 깨달았다. 노파는 꿈 속에서 백발노인한테 선황 다섯 분과 동백 씨앗을 받았다. 선황은 신당에 모시고 씨앗은 동산에 심어 동백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감화를 받아 매년 정월 초하룻날 당집에서 제를 지냈다. 그 후로 고기잡이 나간 장정들이 화를 입지 않은 건 물론이다.

동백정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는 신비로웠다. 날씨 때문인지 바다에서 올라오는 뿌연 해무가 용틀임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여행객들은 바람 난 여자의 입술처럼 붉은 동백꽃과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동백꽃에서 꿀을 따 먹는 새 소리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얼굴이 불콰한 중년의 아저씨들은 봄의 정취에 취해 다른 무리의 또래 여자들에게 수작을 걸기 바빴다. 곧 홍원항으로 가서 매콤한 주꾸미 볶음에 소주 한잔 걸칠 성 싶다. 봄의 춘정을 누가 탓하랴. 안타까움도 있다. 동백정 바로 옆에 화력발전소가 위압적으로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돈이 우선인 속물스런 현실을 이곳도 비껴나지 못했다. 하긴 정부에서 하는 일을 일개 주민들이 당해낼 재간은 없다. 우리가 오래도록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글·사진=우난순 기자 rain4181@

KakaoTalk_20180405_153707997
마량리 동백꽃은 이제야 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서천은 북방한계선에 속해 동백나무가 자란다.
KakaoTalk_20180405_153841635
마량당집. 복전함엔 여행객이 소원을 빌며 놓은 돈이 수북했다.
KakaoTalk_20180405_153745872
동백정 정상에서 바라 본 서해바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해무가 끼어 신비로웠다.
KakaoTalk_20180405_154010005
동백정에서 가까운 홍원항은 자그마한 항구로 아기자기하다. 주꾸미 등 수산물이 풍부하다.
KakaoTalk_20180405_153437025
어민들이 새벽에 나가 잡아온 주꾸미를 선별하고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중리시장 인근 샌드위치패널 건물 화재… 초진 마쳐
  2. 경찰청 경무관급 인사 단행… 충남청 2명 전출·1명 전입
  3. 서산시, 제3회 온(溫)가족 축제 성황리에 개최
  4. 경찰 경무관급 전보 인사는 났는데… 승진 인사는 언제?
  5. 자운대 공간 재창조 사업, '수면 위로 언제 드러날까'
  1. [교정의 날] "사회 지탱하는 교정, 첫 단추는 믿음" 대전교도소 박용배 교감
  2. [중도 초대석] 우송대 진고환 총장 "글로벌 대학서 아시아 최고 AI 특성화 대학으로"
  3. 대전 대덕구, 복합 재난 상정 안전한국훈련
  4. 대전 동구, 어린이 등굣길 교통안전 캠페인 실시
  5. "유성은 대전 성장의 핵심, 긴밀한 협력할 것"

헤드라인 뉴스


`절치부심` 한화 이글스, 대전에서 분위기 반전 노린다

'절치부심' 한화 이글스, 대전에서 분위기 반전 노린다

2025 프로야구 한국시리즈(KS) 1·2차전을 내주며 벼랑 끝에 몰린 한화 이글스가 홈구장인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분위기 반전을 노린다. 한화는 29일 3차전 선발 투수로 에이스 코디 폰세를 LG는 좌완 투수 손주영을 내세운다. 7전 4선승제로 치러지는 KS에서 먼저 2패를 당한 한화는 벼락 끝에 몰렸다. 정규시즌 탄탄한 마운드를 앞세워 저력을 보였지만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1·2선발을 모두 소모한 대가는 예상보다 컸다. 한화 타선은 여전히 양호했으나, 선발과 불펜 운용에서 취약점을 드러냈다. 반면, 정규 시즌 우승팀인 LG는..

충남스포츠센터 문 연다… 다음 달부터 시범 운영
충남스포츠센터 문 연다… 다음 달부터 시범 운영

충남스포츠센터가 문을 연다. 다음 달부터 시범 운영에 들어가며 도민 누구나 최신 체육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도는 28일 내포신도시 충남스포츠센터 다목적체육관에서 김태흠 지사와 체육계 관계자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남스포츠센터 개관식을 개최했다. 충남스포츠센터는 예산군 삽교읍 내포신도시 환경클러스터 내 2만 615㎡ 부지에 592억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 센터는 수영장 및 통합운영센터, 다목적체육관 등 2개 동으로 구성했으며, 연면적은 1만 3318㎡이다. 수영장 및 통합운영센터는 1만 1196㎡의 부지에 연면적..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로드맵… 12월 중순 본격화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로드맵… 12월 중순 본격화

해양수산부의 부산시 이전 로드맵이 오는 12월 중순 본격 실행된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28일 부산시 동구 소재 IM빌딩을 찾아 해수부 청사 이전 상황을 점검했다. 이 자리에는 김 총리를 비롯한 김재철 해수부 기획조정실장, 김성원 해수부 부산이전추진단국장, 성희엽 부산 미래혁신부시장, 박근묵 부산시 해양농수산국장, 김용수 국무2차장 등이 함께 했다. 김성원 단장은 이날 5층 임시 브리핑룸에서 해수부 청사 이전 추진 경과와 상황을 상세히 공유했다. 임대 청사는 IM빌딩(본관 20층 전체)과 맞은편 협성타워(별관 6개 층 중 일부) 2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한화 팬들의 응원 메시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한화 팬들의 응원 메시지

  • 취약계층의 겨울을 위한 연탄배달 취약계층의 겨울을 위한 연탄배달

  • 코스피 지수 사상 첫 4000선 돌파…4042.83으로 마감 코스피 지수 사상 첫 4000선 돌파…4042.83으로 마감

  • 초겨울 날씨에 두꺼운 외투와 난방용품 등장 초겨울 날씨에 두꺼운 외투와 난방용품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