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철 지난 동백꽃에 홀리다- 서천 마량리 동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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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산]철 지난 동백꽃에 홀리다- 서천 마량리 동백정

  • 승인 2018-04-06 09:00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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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마량리 동백정의 동백나무. 수령이 500년이나 된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 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이른 봄 남풍이 살랑살랑 불어오기 시작할 즈음, 시도 때도 없이 봄 노래를 흥얼거렸다. 웃음이 비질비질 비어져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몸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했다. 잠자던 몸의 세포가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겨우 내 빙하기를 연상케 하는 한파 때문에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었다. 집, 회사만 간신히 왔다갔다 하는 최소한의 목숨을 부지하는 힘든 나날이었다. 견딘다는 게 이런 거구나. 과연 봄이 올까, 나무들은 살아 있을까, 제비꽃은 피어날까. 쓸데없는 기우였다. 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봄이 온 것이다.

기찻길 옆은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개나리가 만발했다. 산 밑 마을은 살구꽃이 듬성듬성 수놓았고 어느 집 담장 아래는 수선화가 곱게 피었다. 서천으로 가는 길은 감회가 새로웠다. 오래전 초겨울, 20대 후반에 고등학교 친구가 서천에서 결혼한다고 해서 간 적이 있다. 난 신부 들러리를 서 주기로 했다. 그래서 친구와 그 남편 될 남자와 결혼식 전날 서천으로 갔다. 서천은 친구 남편의 고향이었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 먹고 과자도 먹으면서 한껏 나들이 기분을 냈지만 처음 보는 친구 남편 될 남자와 함께 있으려니 어색하기만 했다. 친구 남편도 숫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천이란 곳을 그때 처음 갔지만 별 기억이 없다. 단지 친구와 하룻밤 묵은 싸구려 여인숙과 경황 없는 결혼식이 희미하게 생각날 뿐이다. 알록달록 요란한 벽지 무늬와 오래된 집에서 나는 큼큼한 냄새에다 꼬질꼬질한 이불 때문인지 잠자리가 영 마뜩잖았다. 이 누추한 곳에서 어떤 인생들이 하룻밤 몸을 누이고 안식을 구했을까. 쓸쓸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나와 친구는 영락없이 갈 데 없는 이방인 신세 같았다. 친구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는 결혼이라고 고백했다. 남동생한테 주먹질을 당한 애인을 보며 자기가 책임져야겠다고 결심했단다. 친구는 훗날 의리가 밥 먹여 주는 세상이 아니더라며 한탄을 했다.

동백꽃은 통영이나 여수 등 남도에서 볼 수 있는 꽃이다. 앞산의 흔하디 흔한 소나무처럼 아랫지방은 동백나무가 그렇다. 그런데 뜬금없이 서천 마량리에 동백나무 군락이 있다. 서천은 동백꽃이 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속한다. 바닷가 가파른 언덕에 수령이 500년 된 수십 그루의 동백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오래된 동백나무는 구렁이가 꿈틀거리는 듯한 가지들이 얽히고설켜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짧지 않은 세월을 동백꽃은 피었다가 지는 행위를 제의처럼 반복했을 테다. 동백꽃은 노란 수술과 빨간 꽃잎의 화려한 꽃임에도 우리에게 슬픔의 정서를 준다. 봄이란 계절이 그런 것 같다. 어느 시인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하지 않았나. 삭막한 겨울 다음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화사한 자연 현상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지기 마련이다. 호르몬의 변화가 한 몫 하는 모양이다. 우울증이 봄에 많이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유 아닐까.

동백정 정상엔 당집이 있다. 시골이나 바닷가 마을에는 으레 서낭당이 있었다. 세상은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 많다. 옛날은 자연 재해에 더 취약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이 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법은 정성껏 제를 올려 신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야 마을은 비로소 안녕하게 된다. 동백정이 탄생하기까지의 전설도 눈물겹다. 500년 전 마량리 마을 사내들은 바다로 고기잡이 하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어느날,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노파는 바다에서 용이 승천하는 걸 보고 용왕을 받들어야 화를 면한다는 걸 깨달았다. 노파는 꿈 속에서 백발노인한테 선황 다섯 분과 동백 씨앗을 받았다. 선황은 신당에 모시고 씨앗은 동산에 심어 동백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감화를 받아 매년 정월 초하룻날 당집에서 제를 지냈다. 그 후로 고기잡이 나간 장정들이 화를 입지 않은 건 물론이다.

동백정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는 신비로웠다. 날씨 때문인지 바다에서 올라오는 뿌연 해무가 용틀임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여행객들은 바람 난 여자의 입술처럼 붉은 동백꽃과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동백꽃에서 꿀을 따 먹는 새 소리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얼굴이 불콰한 중년의 아저씨들은 봄의 정취에 취해 다른 무리의 또래 여자들에게 수작을 걸기 바빴다. 곧 홍원항으로 가서 매콤한 주꾸미 볶음에 소주 한잔 걸칠 성 싶다. 봄의 춘정을 누가 탓하랴. 안타까움도 있다. 동백정 바로 옆에 화력발전소가 위압적으로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돈이 우선인 속물스런 현실을 이곳도 비껴나지 못했다. 하긴 정부에서 하는 일을 일개 주민들이 당해낼 재간은 없다. 우리가 오래도록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글·사진=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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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리 동백꽃은 이제야 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서천은 북방한계선에 속해 동백나무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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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당집. 복전함엔 여행객이 소원을 빌며 놓은 돈이 수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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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정 정상에서 바라 본 서해바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해무가 끼어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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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정에서 가까운 홍원항은 자그마한 항구로 아기자기하다. 주꾸미 등 수산물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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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민들이 새벽에 나가 잡아온 주꾸미를 선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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