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우리 짓는 선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우리 짓는 선

  • 승인 2020-02-09 10:15
  • 수정 2020-06-30 11:32
  • 신문게재 2020-02-10 22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하얀 석회가루가 쏟아져 나오는 라인기로 학교 운동장에 선을 긋는다. 선이 다 그어지면 경기가 시작된다. 선으로 구분된 팀의 일원이 돼 상대 팀을 향해 공을 던졌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놀던 우리가 선 하나에 이기고 지는 사이로 변했다.

선은 우리를 같음과 다름으로 나눈다. 공격은 선에서 시작된다. 2차원을 가르는 걸 넘어 3차원의 공간이 되기도 하는 선은 그 안에 우리를 가두거나, 타인을 가두는 걸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한다.

지난해 분양한 어느 아파트의 일부 동은 다른 동보다 높이가 낮고 어두운 색으로 완성됐다. 얼핏 아파트 상가 건물로 보일 정도다. 이 아파트는 주거지 빈주격차를 줄이기 위해 임대주택과 일반 분양을 한 단지 안에 짓는 '소셜믹스' 정책으로 지은 단지였다. 정책의 취지가 무색할만큼 임대주택은 티가 나게 지어졌다. 다른 소셜믹스 아파트 단지도 층을 나누고 동선을 분리해 구설에 오른 일이 있었다. 건설사들은 조합원과의 협의나 건축비 반영을 이유로 들었다. 그렇게 돈과 사람이 그은 선이 '엘사(LH사는 사람)', '휴거(휴먼시아 거지)' 같은 비하 표현을 낳았다.

#공간을 나누는 격리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선(線)은 선(善)을 가장한다. 코레일톡 앱으로 ITX-새마을호 열차를 예매하려다 본 안내문은 노키즈존을 떠올리게 했다. '유아동반/편한대화 객차입니다. 유아동반/편한대화 객차는 다소 시끄러울 수 있으며, 지나친 소음이 다른 고객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유아와 함께 여행하는 성인이라면 5호차를 타라고 회유하는 느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는 일은 나이에 따라 벌어지는 일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일도 특정 연령과는 관계가 없는데. '유아동반'과 '시끄러울 수 있음'을 연결 지은 문장은 특정 연령의 '격리'를 유도하는 선이 됐다.

#이탈리아에는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없다. 보호소를 폐쇄하기 위해 1978년 제정된 180호 법이 근거다. 법은 보호소에 새 환자를 수용할 수 없게 했고, 정신질환자에게 투표권과 바깥세상에서 살 권리를 돌려줬다.

보호소의 폐쇄를 이끈 프랑코 바잘리아는 이탈리아 고리치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장이었다. 당시 보호소는 고문과 자살이 계속되는 곳이었다. '미친 사람들을 격리하고 정상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보호소의 끔찍한 모습에 그는 시설 폐쇄를 결심한다. 지역 곳곳에 협동조합을 구성해 환자들이 격리를 벗어나 사회에 통합될 수 있게 도왔다. 1978년 이후 이탈리아 사회는 수용돼 있던 환자 대부분을 일원으로 품었다. 정신질환자 보호소라는 선 안에 갇혔던 '미친 사람'들은 이웃이 됐다.

#세상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인생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병을 가진 채 태어나기도 하고, 빚을 진 채 하루하루의 삶이 버거운 환경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임대주택과 일반 분양주택의 생김새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부의 축적을 개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린 아이들이 모두 시끄러울 것이며 곁에 있는 어른이 큰 소리로 이야기 하는 아이를 막지 않을 거라는 생각, 정신질환자는 격리돼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갖는 막연한 불안과 적대감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 정정을 한 사람이 여대에 입학해선 안 된다는 생각도 같은 결일 것이다.

각자 그은 선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선 너머로 혐오의 시선마저 오간다. 나에게 좋은 선은 지켜야 할 선이고, 내게 불편한 선은 넘어야 할 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최선을 가장한 우리의 선에 누군가 갇혀있다면, 지우려고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박새롬 기자 onoino@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통닭 거리'와 '화성행궁'의 조화… 수원이 미식 관광지로 뜬다
  2. 천안시, '백석마을아이파크' 서북구 제43호 공동주택 금연구역 지정
  3. 대전 갑천습지에 일제 금 수탈현장…무너진 동굴입구와 산책로 기초 드러나
  4. 세종 명물 '낙화축제', 국내 대표 콘텐츠로 발돋움한다
  5.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중국전서 반전 노려야…비에 경기 지연 변수
  1. 형소법 개정 일주일 앞두고… 명칭부터 수사 인력 어떻게 달라지나
  2. 캠핑장서 아내 친오빠를 흉기로 살해한 40대…징역 16년 확정
  3. 장종태 "고속도로 안전순찰차 운영 실태 점검 필요"
  4. 천안문화재단, 10월 2일 흥타령춤축제서 '2026 대한민국 무용대상' 본선 개최
  5. ㈜엘림축산, 천안시 중앙동 취약계층 건강식품 후원

헤드라인 뉴스


단양 도담정원에 내려앉은 가을…백일홍 꽃물결 장관

단양 도담정원에 내려앉은 가을…백일홍 꽃물결 장관

가을이 깊어가는 단양 도담정원에 형형색색의 꽃물결이 펼쳐졌다. 빨강과 분홍, 주황, 노랑빛 백일홍이 단양강의 푸른 물결과 어우러지고, 그 너머로 도담삼봉이 자리하면서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가을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단양군은 도담삼봉 인근 도담정원에 백일홍이 만개하면서 가을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넓게 조성된 꽃밭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더라도 단양강과 도담삼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어 가을 나들이와 사진 촬영을 즐기는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백일홍에 이어 보랏빛 꽃까지 더..

절충안 찾은 글로벌 진로탐험대… `현실화` 과제는
절충안 찾은 글로벌 진로탐험대… '현실화' 과제는

달라진 글로벌 진로탐험대, 이제는 순항할 수 있을까. 세종시교육청이 보건복지부 심사 과정에서 우려 사항으로 지목된 예산과 장소, 기간 등을 조정하며 '절충안'을 마련한 가운데, 변경된 사업 방식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체험 권역을 국내와 아시아 중심으로 조정하고 운영 기간을 줄여 학생의 경제적 부담을 일부 덜어냈다는 점에서 사업 현실화에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평가다. 다만 2027년 1~2월 시행을 앞두고 빠듯한 준비 일정, 국내 기존 프로그램과의 차별화, 겨울방학 중 운영의 적절성, 안전 우려 불식 등은 풀어야..

천안법원, 성정동 살인사건 60대 남성 `징역 25년`
천안법원, 성정동 살인사건 60대 남성 '징역 25년'

일면식 없는 지인의 친구 등 3명의 사상자를 낸 60대 남성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대전지법 천안지원 제1형사부는 살인,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A(63·남)씨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하고, 형의 집행종료일부터 5년간 보호관찰을 받을 것을 명령했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A씨와 피해자 B씨는 2010년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고, B씨와 C씨 그리고 D씨는 서로 고향 친구 사이다. A씨는 2026년 5월 26일 서북구 성정동 한 포차식당 안에서 피해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함께 술을 마시던 중 불상의 이유로 격분해 피해자..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추석의 의미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추석의 의미

  • ‘버스전용차로 시행중입니다’ ‘버스전용차로 시행중입니다’

  • ‘풍요롭고 즐거운 추석 명절 되세요’ ‘풍요롭고 즐거운 추석 명절 되세요’

  • 귀성객 맞이 서대전역 방역 ‘꼼꼼하게’ 귀성객 맞이 서대전역 방역 ‘꼼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