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식장산을 걸으며

  • 오피니언
  • 여론광장

[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식장산을 걸으며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20-07-10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호젓한 산길 걷다 보면, 종종 길을 묻는 사람이 있다. 모르면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함에도 정작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 마치 화장이나 몸단장은 할 줄 알면서 마음을 닦지 않는 것과 같다.

남보다 한 가지 더 알고 있다고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반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본인이 잘난 것은 더욱 아니다. 각기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그를 근거로 남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학식의 높낮이와 관계가 없다.



산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한없이 친절하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줄 듯 환대한다. 따지지 않고 상대를 존중한다. 미지의 세계는 남겨두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목적지 물으면 안내와 함께, 아직 멀었는데 '다 왔어요', '조금 남았습니다'도 곁들인다. 속이는 것이 아니라, 격려가 담긴 것이다. 진솔해지면 절로 덕담이 오간다. 서로 돕고 배려한다.

식장산(食藏山)은 596.7m로 대전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계곡도 길고 깊다. 산기슭에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고산사를 비롯하여 개심사와 구절사란 사찰이 있다. 역사 또한 깊다는 이야기다. 고산사는 산내, 개심사는 판암동, 구절사는 옥천 방향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식장산 이름의 유래부터 많은 전설도 산재해 있다.



대전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재해 있는 41개 산성 유적(2012년 조사)이 그를 대변해 준다. 식장산은 신라 공격에 대비 군량미를 비축해 두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식기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는 그 특성상 가감이 많다. 두어 가지 전설의 줄거리만 보자.

은어송이란 젊은이가 늙은 홀어머니 모시고 웃터새말(지금의 가오동 부근)에 살았다 한다. 나무해서 연명한 모양이다. 산 중턱에 절이 있고 법흥이란 중이 있었다. 절도 몹시 구차하여, 은어송은 나무하러 갈 때마다 준비해 간 도시락을 법흥과 나누어 먹었다. 고맙게 생각한 법흥이 보은으로 당대발복 명당 터를 잡아주어 부친 묘를 이장케 한다. 그날부터 좋은 일이 일어나 황소가 들어오는가 하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망쳐 온 한성 대감집 규수를 맞이하여 결혼도 한다. 규수가 가지고 온 금은보화로 새집과 전답을 마련, 풍족하게 생활하며, 글도 배워 고을 군수까지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식기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효성이 지극한 부부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철없는 어린 아들이 어머니 밥을 먹어버리자, 아들을 없애기로 결심, 생매장하기 위해 업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땅을 파다 보니 밥그릇이 나왔다. 기이하게 여겨 그냥 돌아와 늦은 밤까지 고심하며 담배를 피웠다. 가져온 밥그릇에 담뱃재를 털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재가 그릇에 수북했단다. 이상히 여겨 쌀을 한 줌 넣어두고 나갔다 왔더니, 쌀이 그릇에 그득하였다 한다. 밤에는 엽전 한 닢 넣어두고 자고 일어났더니 엽전이 가득했단다. 진기한 그릇 덕에 온 가족이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밥그릇을 다시 이 산에 묻어두었다 한다.

권선징악이나 삼강오륜에 얽힌 전형적인 이야기다. 삼강오륜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며 핵심가치다. 조선이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봉건사회 유지와 사회질서 확립에 기여한 바가 크다. 오늘날에도 우리 의식 속에 잔존하며 많은 영향을 미친다.

1428년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은 크게 탄식하며 '삼강행실도' 제작을 명하였다. 삼강오륜의 교화에 힘썼던 것이다. 기존에 편찬된 '효행록'을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에 전하는 충·효·열 사례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곁들였다. 오늘날 윤리 책인 셈이다. 지속적인 중간과 개역(改譯)작업을 거치며 이해가 쉽도록 언해본도 제작한다. 가감이 많아 제각각이다. '이륜행실도'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둘을 합쳐 '오륜행실도'가 제작되기도 한다.

효를 위해 자해를 한다거나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 국가가 아닌 군에 대한 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거나, 열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마구 버리는 등 오늘날 사회통념에 부적합하거나 불가능한 사례가 많다. 또한, 수직적 상하관계에 천착되어 있거나 여필종부(女必從夫)와 같이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당시에도 비판이 많아, 중간 과정에 지나친 내용을 다수 제외하기도 한다. 특히 여성 입장에서 불편부당하게 생각하였던 점이 많았던 듯하다. 17세기 한문 소설인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5명의 여성 원혼이 등장한다. 하나같이 충절 없고 무능력한 남자를 탓하며, 정조와 정절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호소한다. 열다섯 번째 여인이 '전쟁 중에 절의 있는 충신은 하나도 없고, 늠름하고 당당한 정절은 오직 여인들만이 보여 주었다'고 개탄하는 내용과 같다.

삼강오륜, 상호종중으로 이해하면 오늘날에도 퍽 유효하다. 외진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 대하듯 서로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 따뜻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중도초대석] 임정주 충남경찰청장 "상호존중과 배려의 리더십으로 작은 변화부터 이끌 것"
  2. "내년 대전 부동산 시장 지역 양극화 심화될 듯"
  3. [풍경소리] 토의를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이 이루는 아름다운 사회
  4. 대전·세종·충남 11월 수출 두 자릿수 증가세… 국내수출 7000억불 달성 견인할까
  5. SM F&C 김윤선 대표, 초록우산 산타원정대 후원 참여
  1. 코레일, 철도노조 파업 대비 비상수송체계 돌입
  2. 대전 신세계, 누적 매출 1조원 돌파... 중부권 백화점 역사 새로 쓴다
  3. 대전 학교급식 공동구매 친환경 기준 후퇴 논란
  4. LH, 미분양 주택 매입 실적…대전·울산·강원 '0건'
  5. [특집] CES 2026 대전통합관 유레카파크 기술 전시 '대전 창업기업' 미리보기

헤드라인 뉴스


충남도, 18개 기업과 투자협약… 6개 시군에 공장 신·증설

충남도, 18개 기업과 투자협약… 6개 시군에 공장 신·증설

국내외 기업 투자 유치를 핵심 과제로 추진 중인 충남도가 이번엔 18개 기업으로부터 4355억 원에 달하는 투자를 끌어냈다. 김태흠 지사는 23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김석필 천안시장권한대행 등 6개 시군 단체장 또는 부단체장, 박윤수 제이디테크 대표이사 등 18개 기업 대표 등과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르면, 18개 기업은 2030년까지 6개 시군 산업단지 등 28만 9360㎡의 부지에 총 4355억 원을 투자해 생산시설을 신증설하거나 이전한다. 구체적으로 자동차 기계부품 업체인 이화다이케스팅은 350억 원을 투자해 평택에서..

[기획] 백마강 물길 위에 다시 피어난 공예의 시간, 부여 규암마을 이야기
[기획] 백마강 물길 위에 다시 피어난 공예의 시간, 부여 규암마을 이야기

백마강을 휘감아 도는 물길 위로 백제대교가 놓여 있다. 그 아래, 수북정과 자온대가 강변을 내려다본다. 자온대는 머리만 살짝 내민 바위 형상이 마치 엿보는 듯하다 하여 '규암(窺岩)'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 바위 아래 자리 잡은 규암나루는 조선 후기부터 전라도와 서울을 잇는 금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강경장, 홍산장, 은산장 등 인근 장터의 물자들이 규암 나루를 통해 서울까지 올라갔고, 나루터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과 상인들이 오고 가는 번화가였다. 그러나 1968년 백제대교가 개통하며 마을의 운명이 바뀌었다. 생활권이 부여읍으로 바..

이춘희 전 세종시장, 2026년 지방선거 재도전 시사
이춘희 전 세종시장, 2026년 지방선거 재도전 시사

이춘희 전 세종시장이 23일 시청 기자실을 찾아 2026년 지방선거 재도전 의사를 내비쳤다. 그는 이날 오전 10시경 보람동 시청 2층 기자실을 방문,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입장을 공식화했다. 당 안팎에선 출마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고, 이 전 시장 스스로도 장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이로써 더불어민주당 내 시장 경선 구도는 이 전 시장을 비롯한 '고준일 전 시의회의장 vs 김수현 더민주혁신회의 세종 대표 vs 조상호 전 경제부시장 vs 홍순식 충남대 국제학부 겸임부교수'까지 다각화되고 있다. 그는 이날 "출마 선..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크리스마스 분위기 고조시키는 대형 트리와 장식물 크리스마스 분위기 고조시키는 대형 트리와 장식물

  • 6·25 전사자 발굴유해 11위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 6·25 전사자 발굴유해 11위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

  •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 신나는 스케이트 신나는 스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