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칼럼] 대흥동

  • 오피니언
  • 문화人 칼럼

[문화人칼럼] 대흥동

김희정 시인(미룸 갤러리 관장)

  • 승인 2021-10-13 15:14
  • 신문게재 2021-10-14 19면
  • 오희룡 기자오희룡 기자
김희정 사진 (1)
김희정 시인(미룸 갤러리 관장)
겨울 골목길은 미끄러웠다. 며칠 전부터 눈이 와 있어 오르는 길이 내내 불안했다. 목적지는 테미 공원 밑에 자리 잡은 아담하고 귀여운 도서관이었다. 나지막한 산에 올라서서 내려다보자 도서관과 수도산의 낮은 능선, 그리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한 눈에 반했다. 여기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십 년 전 어느 단체에서 주최한 독후감 대회 심사를 하기 위해 테미 도서관을 갔을 때 한 생각이다. 그 이후 이 동네가 크게 변했냐면 그렇지도 않다. 테미 도서관이 미술 창작센터가 되고 비어있던 도지사 관사촌이 '테미 오래'라고 이름을 달고 전시와 공연을 하는 공간으로 시민에게 문을 열었을 뿐, 그 때 그 지붕들은 그대로이다.

칠십 년대에 집을 지어 이 동네에 이사를 들어왔다는 할머니는 "여기가 그 때에는 대전에서 제일 비싼 동네였어. 사는 사람도 모두 공무원 아니면 대학교수들이고. 우리 바깥양반도 공무원으로 정년 했어" 하고 소리를 높였다.

테미 공원을 중심으로 본 동네는 흥망성쇠가 뚜렷했다. 할머니의 말처럼 서구지역이 개발되기 전 1980년대까지 이곳은 지명처럼 크게 흥한 동네였다. 나는 그 정점을 찍고 내려온 동네의 고적함에 반했다.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저무는 노을을 벗 삼아 올라왔던 길을 내려왔다.



그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을까. 갤러리를 하겠다고 뜬금없이 결심한 날, 이 동네가 떠올랐다. 그렇게 오 년 전 갤러리를 열고, 기어코 몇 달 전 대흥동 주민도 되었다. 갤러리를 연 이후 재개발 열풍이 이곳에도 왔다. 평균 칠십 대인 것만 같았던 골목길 유동인구도 '테미오래'라는 문화프로그램이 생긴 때문인지 많이 낮아졌다.

그래도 아직 테미공원 아래 아파트는 들어서지 않았고, 골목길은 여전히 고적하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동네 사람들과 새벽 인사를 나누고 골목길을 걸으며 짧은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저녁이 되면 막걸리 한 잔 하자며 전화를 건다. 목을 축이고 돌아오는 길은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언덕을 올라와야 한다. 아직 눈을 만나지 못했지만 소읍을 걷는 기분이다. 흥이 올라 노래 한가락 흥얼거리면, 크게 흥할 것이라는 동네 이름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새벽마다 담장 안으로 가지 친 옆집 감나무의 홍시 하나를 주워 입에 넣고, 감나무 주인 할머니와 안부 인사를 나눈다. 젊은 사람이 늘어났어도 아직은 노인이 대부분인 동네라서 날씨 얘기 아니면 병원 다녀온 이야기다. 남의 집 숟가락 몇 개까지는 몰라도 아픈 사정은 알아준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 이웃과 왕래를 하는 것을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때맞춰 남의 집 대문에 밤이나 감을 한두 개 걸어두고 가는 할머니들을 보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에 둥지를 튼 일이 행운 같다.

여기에 문화예술거리를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예전부터 있었던 이야기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요즈음 하는 것을 보면 제법 일이 진전된 모양이다. 젊은 사람도 동네에 늘고 대흥동 이름에 걸맞는 일이 될지도 모르고 꼭 동네에 좋기만 한 일 같은데 나는 주민 참여 없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다른 원도심 재생사업이 떠올라 좋지만은 않다. 그냥 이대로 자연스럽게 봄이 오면 테미공원에서 벚꽃을 보고 창작센터와 테미오래에서 미술작품과 작가를 만나고 여름과 가을 길목에서 수도산 나뭇잎을 보았으면 좋겠다.

관광지로 흥하는 대흥동大興洞이 아닌 문화예술과 도심 속 자연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대흥동이 되길, 이사 온지 한 달밖에 안 된 동네 사람의 바람을 이 가을 골목에 떨어진 낙엽들을 보며 생각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셔츠에 흰 운동화차림' 천태산 실종 열흘째 '위기감'…구조까지 시간이
  2. 노노갈등 논란에 항우연 1노조도 "우주항공청, 성과급 체계 개편 추진해야"
  3. 응원하다 쓰러져도 행복합니다. 한화가 반드시 한국시리즈 가야 하는 이유
  4. ['충'분히 '남'다른 충남 직업계고] 홍성공업고, 산학 결합 실무중심 교육 '현장형 스마트 기술인' 양성
  5.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1. 유성구장애인종합복지관, 여성 장애인들 대상 가을 나들이
  2. 김태흠 충남도지사, 일본 오사카서 충남 세일즈 활동
  3. ‘자랑스런 우리 땅 독도에 대해 공부해요’
  4. "행정당국 절차 위법" vs "품질, 안전 이상없어"
  5. "대전 컨택센터 상담사님들, 올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헤드라인 뉴스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절차 위법"-"안전 이상무" 팽팽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절차 위법"-"안전 이상무" 팽팽

정치권 일각에서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 논란을 제기한 가운데 23일 현장에서 열린 정부 안전점검에서도 서로 극명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안전 논란을 처음 들고 나온 더불어민주당 장철민 의원(대전동구)은 행정당국의 법정 절차 위반을 대전시는 자재의 품질과 교량의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점에 각각 방점을 찍었다. 더불어민주당 장철민 의원(대전동구)에 따르면 이날 점검은 국토교통부, 국토안전관리원, 건설기술연구원, 대전시 등 관계자가 참석했다. 회의 이후 장 의원은 대전시가 중고 복공판을 사용하면서 법정 절차를 위반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기획] `가을 정취 물씬` 자연이 살아 숨쉬는 충남의 생태명소
[기획] '가을 정취 물씬' 자연이 살아 숨쉬는 충남의 생태명소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충남도의 명산과 습지가 지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힐링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청양 칠갑산을 비롯해 예산 덕산, 공주 계룡산, 논산 대둔산, 금산 천내습지까지 각 지역은 저마다의 자연환경과 생태적 특성을 간직하며 도민과 관광객에게 쉼과 배움의 공간을 제공한다. 가을빛으로 물든 충남의 생태명소를 알아본다.<편집자 주> ▲청양 칠갑산= 해발 561m 높이의 칠갑산은 크고 작은 봉우리와 계곡을 지닌 명산으로 자연 그대로의 울창한 숲을 지니고 있다. 칠갑산 가을 단풍은 백미로 손꼽는다...

개물림 피했으나 맹견 사육허가제 부실관리 여전…허가주소와 사육장소 달라
개물림 피했으나 맹견 사육허가제 부실관리 여전…허가주소와 사육장소 달라

대전에서 맹견 핏불테리어가 목줄을 끊고 탈출해 대전시가 시민들에게 재난안전문자를 발송한 사건에서 견주가 동물보호법을 지키지 않은 정황이 여럿 확인됐다. 담장도 없는 열린 마당에 목줄만 채웠고, 탈출 사실을 파악하고도 최소 6시간 지나서야 신고했다. 맹견사육을 유성구에 허가받고 실제로는 대덕구에서 사육됐는데, 허가 주소지와 실제 사육 장소가 다를 때 지자체의 맹견 안전점검에 공백이 발생하는 행정적 문제도 드러났다. 22일 오후 6시께 대전 대덕구 삼정동에서 맹견 핏불테리어가 사육 장소를 탈출해 행방을 찾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 재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유등교 가설교량 안전점검

  • ‘자랑스런 우리 땅 독도에 대해 공부해요’ ‘자랑스런 우리 땅 독도에 대해 공부해요’

  • 상서 하이패스 IC 23일 오후 2시 개통 상서 하이패스 IC 23일 오후 2시 개통

  • 한화이글스 우승 기원 이벤트 한화이글스 우승 기원 이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