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산책"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산책"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승인 2023-06-12 09:56
  • 수정 2023-06-12 20:18
  • 신문게재 2023-06-13 19면
  • 이유나 기자이유나 기자
조훈성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글쓴이들은 늘 오늘이 며칠인지를 따진다. 나는 글머리 첫 구절을 고심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즈음, 유월의 현충일을 도저히 접고 갈 수가 없었다. '현충일 노래'의 4분의 4박 플랫에 따라 기억을 더듬었지만, 음은 가까이 있어도 가사가 멀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라는 노랫말을 오래간만에 나지막이 따라 부른다. 현충일도 전에 이미 태극기를 꺼내든 것 같다. 노래를 불렀다고 이 국가추념일의 마음가짐이 크게 남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충일을 맞아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용사의 투쟁이자 정치를 어떤 다양한 기억투쟁으로 편을 갈라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극의 기억, 역사적 질곡의 수많은 가슴 아픈 현장에서 우리는 어떤 '기억'으로 이 상실의 시대를 벗어나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최근 국립극단 창작공감 작품이었던, '몬순'(이소연 작, 진해정 연출)은 전쟁의 바깥에서 바라보는 전쟁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각자의 시공에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어간다. 잔잔한 바람이기도 하고, 소나기가 되어 사방으로 퍼붓기도 하는 몬순처럼, 우리는 이 연극에서 그렇게 다르게 나열되는 그 조각난 파편들의 이야기가 사실, 깊숙이 스며들어 곪아버린 하나의 '전쟁 현실' 당사자로서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어린 소년의 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 괴물의 유리 알갱이가 나한테 날아온 거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산책, 그게 진짜였어. … 눈을 비벼도 거기 있었어. 괴물의 몸에, 분명…(작게) 내가 있었어."라는 아이의 악몽은 폭탄이 떨어지고 살상이 이루어진 전장이 아니었음에도 고스란히 그 전쟁을 감각하게 된다. 어제의 전쟁의 고통은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 비극의 기억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고통은 끝나지 않고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이 연극의 무대에서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를 주제로 강화도를 읽는 이동형 공연 '강화도 산책: 평화도큐먼트'(전윤환 연출)을 얼마 전에 다녀왔다. 2021년부터 진행해온 이 작품은 창작자의 지역리서치를 통해 구 강화대교 앞에서부터 시작해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지', '6.25참전용사기념공원', '연미정', '고려천도공원도로', '교동도' 등을 잇는 세 시간여 지역산책 프로그램이다. 강화도에서 생활하는 청년세대가 바라보는 지역의 역사, 생태계, 문화를 엮은 이야기를 통해 '남과 북', '평화'에 대해 관객과 소통한다. 이들의 리서치와 함께 발화되는 각 개인의 서사는 오늘의 '평화'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고도 진실한 목소리로 전해지면서, 관객은 접경지역 강화도를 둘러싼 분단의 긴장감과 고요한 평화가 공존하는 기이한 오늘의 경험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나는 이 접경의 철책선 산책이야말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산책'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철책을 넘어 어스름한 해안선을 타고 건너가는 것과 건너가지 못한 것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그토록 추념하고 있는 어제를 통해 '과연 무엇을 변화시켰단 말인가'하는 자책과 함께 이질화된 섬에 체화되어 내 폐부가 딱딱해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는 '전쟁' 현실을 실감해본다며 뉴스매체든 소셜미디어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드론 영상으로 시청하면서 짐짓 가슴 아픈 현실이라고 가볍게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를 일이다. 또는 그 무참한 시쳇더미와 파괴된 폐허 앞에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며 이를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어쩌면 역사와의 진실한 화해와 한 울타리의 평화는 그 지난한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 벌어진, 벌어지고 있는 이 '고통의 감각'은 사유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각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어 평화를 향한 걸음이 될 것인지 우리는 경계에 서 있다. 유월, 그 내림의 플랫이 이제 치유를 위한 받침대가 되려면, 그 길고 긴 상실의 시간 이후에 우리가 어제에 어떻게 손을 흔들어야 할 것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 그 고통스러운 산책 이후, 오늘 여기에서 그 시작이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조훈성 연극평론가, 충남시민연구소 이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본격 발주 시작
  2. 이장우 "'野, 가수 많이 오는 뿌리축제는 비판 안하나"
  3. 천안검찰, 면허취득 후 경력 없는 자식 채용 강요 타워크레인 기사 일당 ‘벌금형’
  4. 제17회 이홍렬의 락락 페스티벌, 10월 18일 세종시 노크
  5. 초록우산, 한국외식업중앙회와 '나눔가게' 캠페인 확산 업무협약
  1. 천안시, 민관학 협력네트워크 '청춘동행' 청년 일자리 창출 모색
  2. 무면허 SUV가 10대 여고생 탄 킥보드 들이받아… 여고생 2명 중경상
  3. [날씨] 9일 한글날 아침은 쌀쌀…낮은 따뜻
  4. 대전유성장로교회 창립 70주년 맞이 새생명행복축제
  5. 유등노인복지관과 래디앙치과의원 업무협약

헤드라인 뉴스


정부서 전세사기 피해 인정 받았지만…경찰은 혐의 없음

정부서 전세사기 피해 인정 받았지만…경찰은 혐의 없음

전세사기 피해 대란이 발생한 지 2년이 지났지만, 피해자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최근 전세보증금 피해를 입은 대전 거주민 A(37)씨는 정부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수사기관에서는 사기 피해자로 보지 않는 당혹스러운 사연을 전했다. A씨는 2020년 총 8세대가 사는 유성구 원신흥동 다세대주택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2년 거주 후 계약 종료시점인 2022년 전세 보증금 피해 사실을 알았다. 임대인은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을 것 같다며 A씨를 포함한 피해 임차인들의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임대인이 전세보증..

낙서·신발자국 뒤덮인 천안시민의 종…관리부실 도마
낙서·신발자국 뒤덮인 천안시민의 종…관리부실 도마

천안시가 7년 만에 다시 품은 '천안시민의 종'이 관리부실로 인해 낙서와 신발자국으로 뒤덮여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7일 시에 따르면 천안시민의 종은 2005년 인구 50만명 진입 후 시민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됐으며, 2017년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철거돼 충북 진천군 성종사에서 보관되고 있다가 최근 시청사 부지 내에 이전 설치했다고 밝혔다. 천안시민의 종이 처음 제작될 당시 예산은 본체 6억9700만원과 종각 7억원이었으며, 이후 4억원의 해체비용, 매년 보관료 420여만원이 들어갔다. 최근 진행된 이전 설치는 19..

세종 `정원박람회·빛축제` 논란...10월 7~11일 최대 고비
세종 '정원박람회·빛축제' 논란...10월 7~11일 최대 고비

2024 세종 빛 축제와 2026 국제정원도시박람회 예산 삭감 논란이 10월 7일부터 11일 사이 가장 큰 고비를 맞이할 전망이다. 7일 민주당 원내대표, 10일 의장의 임시회 개최 전 정례 브리핑, 11일 제93회 임시회 개회 일정이 연이어 예고되면서다. 9월 4일 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의 과정부터 시작된 '정상 반영 vs 전액 삭감' 입장 간 대립각이 좁혀질지가 최대 관심사다. '민주당 vs 국힘' 정쟁으로 비화된 갈등은 한 달째 지속되며, 시민사회와 언론, 집행부, 정치권 모두의 피로감으로 쌓이고 있다. 최민호 세종시장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한국의 정(情)을 고향에 전하세요’ ‘한국의 정(情)을 고향에 전하세요’

  • 한글 표기 간판과 외국어 간판 한글 표기 간판과 외국어 간판

  • 복구는 언제쯤? 복구는 언제쯤?

  • ‘퀴즈 풀며 안전을 배워요’…SAFE 대전 어린이 안전골든벨 성료 ‘퀴즈 풀며 안전을 배워요’…SAFE 대전 어린이 안전골든벨 성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