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삼계탕만 보양식인가 뭐?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삼계탕만 보양식인가 뭐?

  • 승인 2024-08-21 09:55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240821_095329865
대학 2학년과 4학년 때 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학기마다 제비뽑기로 방 배정을 받는데 방을 누구와 쓰느냐가 중요했다. 성격이 안 맞아 중간에 나가기도 하니까. 2학년 1학기는 정치사회적으론 격동기였으나 개인적으론 '화양연화'였다. 방 식구는 선배였는데 편하고 또 개인 과외를 하느라 10시 점호 직전에 들어왔다. 그러니 내 세상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과외를 전면 금지했지만 돈 있는 집은 암암리에 다 하던 시절이었다. 마음이 편해서인지 자면서 꿈 한 번 안 꿨다. 1980년대 중반이니까 기숙사는 연탄을 때는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가족같은 분위기였다. 코딱지만한 방에서 기숙사 친구들과 맛동산과 웨하스를 먹으며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둥 수다떠는 재미로 하루하루가 요순시대였다.

기숙사 건물 1층엔 '유노'라는 분식집이 있었다. 대개는 구내식당을 이용했는데 종종 이 곳에서 비빔밥이나 수제비를 먹었다. 가격도 저렴했지만 수제비 맛이 끝내줬다. 찰떡처럼 쫀득쫀득한 식감. 냉면그릇만한 플라스틱 대접에 한 가득 담아주는 인심도 한몫 했다. 고춧가루 양념장을 풀어 바삭한 김을 뿌셔넣은 얼큰한 국물을 지금도 생각하면 침이 고인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수제비였다. 내가 팔아준 수제비로 주인은 건물 한 채는 사지 않았을까? 당시 우리 학교 구내식당 밥은 타 대학에도 소문 나 일부러 먹으러 오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늦게 가면 음식이 떨어져 입맛만 다시고 나와야 했다. 그런데 다음해 학교에서 외부 업체에 용역을 줘 음식 질이 형편없는데다 가격도 올라 파리만 날렸다.

서론이 길었다. 악쓰고 울어대는 매미소리와 염천으로 이글거리는 휴일 한낮에 수제비를 해먹었다. 먼저 고추장과 된장은 1대 5로 물에 푼다. 푹푹 끓으면 털이 보송보송한 까슬한 호박잎을 썬다. 갓난아기 살처럼 야들야들한 둥근 애호박은 손으로 쥐어뜯어 호박잎과 함께 펄펄 끓는 국물에 넣는다. 이 수제비의 포인트는 청양고추. 쫑쫑 다지듯이 넉넉하게 썰어 넣는 것. 스뎅 볼에 밀가루와 물을 넣어 적당히 섞는다. 이 '적당히'란 단어가 적확하다. 물수제비란 말씀! 한손을 수저로 반죽을 떠서 다른 손 수저로 떼어 넣으면서 간간이 잘 익도록 휘젓는다.

이 장수제비는 엄마가 해주던 별미였다. 엄마는 손으로 물컹물컹한 반죽을 한참을 꾹꾹 주물렀다. 그걸 오랜 세월 사용해 가운데가 파인 수제비용 나무도마에 쭉 펴서 칼로 뚝뚝 잘라 넣었다. 매콤하고 구수한 장수제비.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 식구가 두리반에 둘러앉아 뜨끈한 수제비를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수제비는 보양식이 따로 없었다. 우리 식구는 여름이 오면 으레 엄마가 해주는 수제비로 뜨거운 한 철을 견뎠다.

30대에 대사동 오래된 다세대주택에 살 적에 옆집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병원 약제실에서 근무하던 아이가 있었다. 김천에서 왔다는데 붙임성 있고 밝았다. 하루는 퇴근하고 저녁에 장수제비를 하는데 지나가다 열린 문틈으로 아는 체를 했다. 수제비 끓이는데 같이 먹자고 하니 좋아라 했다. 키우던 강아지도 데리고 와서 순식간에 방안이 시끌벅적했다. 강아지도 주인을 닮아 쾌활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냄새 맡고 난리였다. 그 해 겨울, 아이는 직장을 그만 둔다고 했다. 고졸 임시직이라 비전이 없다면서 전문대라도 나와야 할 것 같다고. 학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터. 그리고 하는 말. "언니, 여름에 해준 수제비 너무 맛있었어요. 자꾸 생각나서 또 해달라고 할까 그랬다니까요." 그러고 그 애는 바로 이사 갔다. 시인 박인환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했다. 수제비를 먹으면서 떠난 이들을 생각했다. 이젠 추억을 먹고사는 나이가 됐다.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도시공사 신임 사장에 이효식 전 대전시 주택정책과장 임명
  2. '2기 조사중지' 벽 넘었다… 3기 진실화해위, 충청 미군 민간인 희생 29명 '진실규명'
  3. 아산시의회, 하반기 의정연수 성료
  4. 아산축협, 양계농가에 Ai 면역증강제 지원
  5. 아산시, 숙박업소 30곳에 위생물품 지원
  1. 아산시, 체납자 맞춤형 징수 본격화
  2. 수능·내신 대전환에 국제중 인기…7년 새 지원자 73.6% 증가
  3. 아산시, 2027년도 국비 확보 '총력'
  4. 배관중 천안시의원, 안서동 금호어울림아파트 주민 교통 불편 해소 나서
  5. 상명대 학생들, 서점서 '리타 길들이기' 낭독 공연

헤드라인 뉴스


3기 진실화해위, 충청 미군 민간인 희생 29명 `진실규명`

3기 진실화해위, 충청 미군 민간인 희생 29명 '진실규명'

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상교)는 지난 3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8차 위원회를 열고, 과거 2기 진실화해위원회 당시 '조사중지' 결정에 머물렀던 '충청지역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 한국전쟁 전후 미군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공식 인정하고 29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번 결정은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규명되지 못하고 조사중지 상태로 남아있던 억울한 희생의 진상을 3기 위원회가 재조사해 진실규명 결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진실규명 결정이란 법에 따라 신청 사건 조사..

수능·내신 대전환에 국제중 인기…7년 새 지원자 73.6% 증가
수능·내신 대전환에 국제중 인기…7년 새 지원자 73.6% 증가

수능과 내신 평가체계 변화로 대입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중학교 단계부터 학업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국제중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특목고·자사고 진학 실적과 영어 중심 교육환경 등이 맞물리면서 국제중 선호도도 높아지는 추세다. 6일 종로학원이 분석한 2027학년도 국제중 지원 현황에 따르면 전국 5개 국제중 가운데 경쟁률을 공개한 4개 학교의 지원자는 8998명으로 집계됐다. 474명 모집에 평균 경쟁률은 18.98대 1로, 최근 7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원자는 2021학년도 5182명에서 2025학년도 8597명까지 꾸준히..

유성구 직원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국화축제…관람객 호응 `만발`
유성구 직원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국화축제…관람객 호응 '만발'

대전 유성구의 '제17회 유성국화축제'가 형형색색의 국화로 물든 도심 속 정원과 특별한 사연을 담은 조형물로 시민과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지난 10월 17일부터 11월 8일까지 유림공원과 유성천 일원에서 열린 이번 축제는 당초 11월 1일까지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관람객들의 높은 관심과 호응에 힘입어 일주일 연장 운영됐다. 특히 모든 국화조형물은 미술이나 조형을 전문적으로 배운 경험이 없는 유성구 직원들이 도면 없이 직접 제작하고 관리하는 작품이다. 이런 사실이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실제 한 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깊어가는 가을과 낙엽 깊어가는 가을과 낙엽

  • 난방용품 판매 준비 분주 난방용품 판매 준비 분주

  • 울긋불긋 물든 도심 울긋불긋 물든 도심

  • 대전 갑천4BL 청년주택 공급사업 기공식 대전 갑천4BL 청년주택 공급사업 기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