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지금, 꽃보다 나무가 되고 싶다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지금, 꽃보다 나무가 되고 싶다

이정화 대전보건대학교 총장

  • 승인 2025-05-27 16:06
  • 신문게재 2025-05-28 18면
  • 김흥수 기자김흥수 기자
이정화 총장
이정화 대전보건대학교 총장
햇살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오후 7시를 훌쩍 넘겨도 창밖은 여전히 밝고, 나뭇잎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흔들립니다. 어쩐지 하루가 길어진 것 같고, 시간도 조금은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이맘때면 언제나 느껴지는 감정이 있습니다. 봄이 아직 다 가지 않은 것 같지만, 여름이 그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 6월은 참 묘한 계절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계절로 넘어가기 전의, 조금은 멈칫한 시간. 나아가려는 걸음과 머무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되는 시기.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 시기에 유난히 '나무'를 떠올립니다. 언젠가부터 꽃보다 나무가 더 좋아졌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화려한 꽃을 좋아했습니다. 그 짧은 전성기 동안 온 마음을 다해 피어나는 모습, 눈길을 사로잡는 색과 모양, 무엇보다 주변의 관심과 찬사를 한몸에 받는 생명력이 부러웠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빨리 피고, 크게 피고, 남들이 보기에도 근사한 모습으로. 마치 누군가의 눈에 띄기 위해,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빛나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삶의 목적처럼 느껴지던 때가 분명 있었습니다. 목표는 늘 '더 나은 나', '더 많이 가진 나', '더 빛나는 나'였고, 속도는 중요했고, 타인의 시선은 나침반이 됐습니다. 그렇게 숨가쁘게 달리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조금씩 속도를 바꾸고, 하루하루가 조용히 쌓여가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저는 점점 나무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조용합니다.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신을 바꾸고, 햇살이 쏟아질 땐 그늘이 되어주고, 비바람이 몰아칠 땐 묵묵히 맞으며 그 자리를 지켜냅니다.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는 자신만의 생명력. 그건 살아본 사람만이 아는 고요한 단단함입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만의 시간과 이유를 품은 존재들이 있다는 걸요.

나무가 좋아진 건 아마도,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보여질까'를 먼저 생각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살아낼까'를 더 고민하게 됩니다. 성과보다는 지속을, 박수보다는 균형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누구보다 빨리 가기보다, 나에게 맞는 속도로 오래 걷는 것이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따금 '지금쯤은 뭔가를 이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조급함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봅니다. 가로수 위로 펼쳐진 잎의 그늘, 그 아래에서 발걸음을 늦추는 사람들, 서두르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쉼이 되어주는 나무의 모습에서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충분한 존재. 삶이란 그렇게 조용히 성숙해가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6월은 그런 성찰을 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상반기의 끝자락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고, 무엇을 잘했고 무엇은 미루었는지, 지금 이 방향이 맞는지 조용히 묻기 좋은 시간입니다. 어릴 적엔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푸릇한 나뭇잎이 언젠가 색을 바꾸고, 낙엽이 쌓이고, 다시 또 싹이 나는 일. 삶도 계절처럼 반복되기에, 지금 이 순간이 반드시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오리라는 것. 그리고 어떤 계절이 오든, 그 안에 나만의 방식으로 버티고, 견디고,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이제, 꽃보다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찬란함보다, 오래 머물며 마음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나무 같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혹시 당신도 요즘, 꽃보다 나무에 마음이 가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그건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나무처럼 묵묵히 하루를 살아낸 당신, 그 자체로 참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지금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꽃이 되기보다는 나무가 되어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도 나무처럼,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켜주세요.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큰 위로가 될 테니까요. /이정화 대전보건대학교 총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사설] 최교진 교육장관의 '교권 보호' 언급
  2. [월요논단] 교통약자의 편리한 이동을 위한 공공교통
  3. [사설] K-스틸법으로 철강산업 살려내야 한다
  4. 지질자원연 창립 77주년, 새 슬로건 'NEO KIGAM 지구를 위한 혁신'
  5. 특구재단 16~17일 '대덕특구 딥테크 창업·투자주간'
  1. 대전권 4년제 수시 경쟁률 상승… 한밭대·우송대 선전
  2. [홍석환의 3분 경영] 무능한 리더가 조직에 미치는 영향
  3. 폭우에 도로 잠기고 나무 쓰러져…당진서 알레르기 환자 긴급 이송
  4. 9월 무더위 계속…16일 충남 서해안 강우
  5. 조선 조운선 '마도4호선' 첫 발굴 10년만에 선체인양…나무못과 볏짚 활용 첫 확인

헤드라인 뉴스


역대 정부 `금강 세종보` 입장 오락가락… 찬반 논쟁 키웠다

역대 정부 '금강 세종보' 입장 오락가락… 찬반 논쟁 키웠다

이재명 새 정부가 금강 세종보 '철거 vs 유지' 사이에서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면서, 찬반 양측 모두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미래 방향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 정부부터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실제 노무현 정부 당시에는 행복도시 내 '금강 친수보' 건립으로 추진했으나, 문재인 정부에선 주민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철거'란 상호 배치된 흐름을 보였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보'와 태생이 다르나 같은 성격으로 분류되면서다. 지방정부 역시 중립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환경부가 밀어부치기식 정책 추진을 할..

규제도 피하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주택신축판매업자 급증
규제도 피하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주택신축판매업자 급증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건설 승인을 받지 않고 주택 통계에도 포함되지 않는 ‘주택신축판매업자’가 전국적으로 8만7876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엄격한 주택법을 피하면서 주민 복리시설이나 소방시설 등 엄격한 규제조차 제대로 받지 않는 데다, 정부의 주택통계 작성과정에서도 빠져 부실한 관리를 초래해왔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더불어민주당 박용갑 의원(대전 중구)이 국토교통부로 받은 ‘주택신축판매업을 영위하는 개인·법인 가동사업자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적으로 모두 8만7876개의 주택신축판매업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주택신..

정부, 추석 성수품 역대 최대 규모 공급... 최대 900억 투입 과일 등 할인
정부, 추석 성수품 역대 최대 규모 공급... 최대 900억 투입 과일 등 할인

정부가 추석 성수품을 역대 최대 규모인 17만 2000톤을 공급한다. 최대 900억원을 투입해 과일·한우 등 선물 세트를 최대 50% 할인하며, 전국에 2700여 곳의 직거래장터를 개설한다. 정부는 1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이러한 내용의 '추석 민생안정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농·축·수산물의 가격·수급 안정을 위해 공급을 확대한다. 공급 물량은 농산물 5만톤, 축산물 10만 8000톤, 수산물 1만 4000톤 등 17만 2000톤으로, 평시의 1.6배 규모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새마을문고 사랑의 책 나눔…‘나눔의 의미 배워요’ 새마을문고 사랑의 책 나눔…‘나눔의 의미 배워요’

  • 추석맞이 자동차 무상점검 추석맞이 자동차 무상점검

  •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초등3~4학년부 FS오산 우승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초등3~4학년부 FS오산 우승

  •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여성부 예선 제16회 대전시 동구청장배 전국풋살대회 여성부 예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