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흘려보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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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흘려보내는 법

황미란 지방부장

  • 승인 2025-10-01 14:33
  • 신문게재 2025-10-02 22면
  • 황미란 기자황미란 기자
내사진-칼럼
황미란 지방부장
냉장고 문을 연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말라 비틀어진 대파와 물러터진 호박. 푸짐한 된장찌개를 끓여내기 위해 부지런히 사 두었던 식재료들이다. 며칠 전이었나? 아니 몇 주 전이던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 아래 과일 칸에는 쭈글쭈글한 사과 몇 알이 나뒹군다. 아주 형편없는 모양새다. 아마도 지난 설 무렵에 장만한 것일 게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은 사이 냉장고 귀퉁이서 때를 놓쳐버린 채소와 과일들. 제 맛과 향기를 잃은 채 그렇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급한대로 씻어보고, 잘라도 봤지만 회생 불가, 영락없는 음식물쓰레기통 신세다.

옷장 속 풍경도 다르지 않다. 몇 년간 애지중지 잘 입고 다녔던 옷가지들, 다시 꺼내 보니 촌스럽기 그지없다. 한때는 얼굴빛을 환하게 밝혀주던 니트 색깔은 오히려 온 몸에 칙칙함을 드리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 고치고 한 번, 머리 단장하고 한번. 입어보고 또 매만져 보지만 어쩔 수 없다. 어이없게도 몇 년 전 큰맘 먹고 장만했던 구두는 우스꽝스럽게 까지 느껴진다. 유행이 바뀌어서일까? 나이가 든 탓일까? 마음이 변한 탓일까? 이유야 어떻든 '설렘의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들이 혹시나 하는 미련과 함께 옷장 가득, 신발장 가득 쌓여 있다. 이제는 버려야하는데….

말도 그렇다. "괜찮아?" 유난히 우울해 보이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혹시나 눈물이라도 터질까 싶어 그냥 삼켜버렸다. 나중에 마음 가라앉으면 조근 조근 얘기해야지 생각했지만, 그 다음은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의 위로는 효력을 다한 감기약 같다. 또 어떤 날에는 건너 건너 들은 말 한마디가 궁금해졌다. "너 그때 정말 그런 말 했어?", "그 말의 의미가 뭐야?"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적당한 기회를 잡지 못해 흐르는 시간 속에 묻어버렸다. 그렇게 찐득하게 남은 마음 깊은 곳의 앙금. 적당한 때를 놓쳐버린 위로와 질문은 엉뚱한 뒷북이 되고, 오해의 불씨가 된다. 결국 말에도 '유효기간'이, 또 '유통기한'이 있다.

인간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어린 시절 죽고 못 살던 친구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자연스레 멀어진다. 몇 해를 동고동락했던 직장 동료도 퇴사와 결혼을 거치면서 드문드문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된다. 평생 이어질 것 같던 인연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빛이 바랜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마음이 더 이상 서로를 찾지 않게 되면 관계는 그것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오래 입은 옷처럼 꾸밈없이 편안한 관계도 있다. 그런 인연은 유효기간을 넘어선 선물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것은 흔치 않은 일. 대개의 관계는 그 시절, 그 순간에 끈끈했다가도, 각자의 형편과 삶의 변화 속에서 속절없이 흩어져 버린다. 시절인연이라고 했던가.

삶은 결국 수많은 유효기간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건져 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억지로 인연의 기한을 늘리지 않으려 한다"는 어느 현자의 다짐처럼 '흐름에 따라 흘려보내는 법'을 배워보려 한다. 이미 상한 음식을 냉장고에 모셔두지 않듯,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꿰어 입지 않듯, 더 이상 힘을 잃어버린 말을 되뇌지 않듯. 대신 그 순간에 주어진 인연을 마음껏 누리려 한다. 제철 과일의 맛을 음미하듯, 빛나는 한때를 충분히 즐기듯. 끝이 와도 아쉬움보다는 고마움이 남을 수 있도록….

황미란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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