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 설치 실적이 가리는 정전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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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칼럼] 설치 실적이 가리는 정전의 그림자

한승문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책임연구원

  • 승인 2026-03-19 17:33
  • 신문게재 2026-03-20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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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문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책임연구원
호르무즈 해협이 막혔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세계 원유 수송량의 약 20%가 지나는 이 해협의 봉쇄가 현실화됐고, 국제 에너지 시장은 다시 한번 공급망 충격의 공포 앞에 섰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비롯한 각종 회의에서 에너지 자립화와 재생에너지 가속화를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 위기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다. 화석연료 수입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방향은 옳고,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판단도 타당하다. 그것을 반대하는 전력 엔지니어는 없다. 다만 그 가속화가 실질적인 에너지 안보로 이어지려면, 보급 실적이라는 숫자 뒤에 가려진 전력망의 세 가지 문제를 반드시 함께 풀어야 한다. 설치된 발전소가 만든 전기가 실제로 가정과 공장까지 안정적으로 도달하고 있는가. 전력망은 그 전기를 안전하게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력계통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깊은 우려가 퍼지고 있다.

첫째는 관성의 문제다. 전력망은 60Hz 주파수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흔들리면 공장 장비가 오작동하고 심하면 대규모 정전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이 주파수를 지켜온 것은 석탄, 가스, 원자력 발전소 안의 거대한 터빈이다. 수십 톤짜리 회전체가 쉬지 않고 돌면서 갑작스러운 수급 변동을 자기 회전 에너지로 흡수하는데, 이것이 바로 관성이다. 그런데 태양광 패널에는 회전하는 부품이 없고, 풍력터빈도 인버터를 거쳐 전기를 내보내기 때문에 이 관성이 계통에 전달되지 않는다. 재생에너지가 기존 발전기를 밀어낼수록 전력망의 충격 흡수 능력은 사라진다. 2016년 남호주 대정전과 2019년 영국 정전 모두 관성 부족이 핵심 원인이었다.

둘째는 출력제한의 문제다. 재생에너지는 만든 전기를 계통이 받아내지 못해 버려야 하는 상황을 점점 자주 만들어낸다. 보급 실적은 올라가지만, 실제로 쓰이지 못하고 낭비되는 전기도 함께 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는 태양광 출력제한 횟수가 2015년 3회에서 2022년 132회로 급증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낮 시간대 태양광 과잉으로 발전사업자가 오히려 돈을 물어내며 전기를 처분해야 하는 시간이 연간 1,000시간을 넘겼다. 발전 용량을 키우는 만큼 계통이 받아낼 능력도 함께 갖추지 않으면, 설치 실적은 쌓여도 전력 낭비 역시 그만큼 함께 쌓이는 역설이 생긴다.

셋째는 송전망의 문제다. 한국은 유럽처럼 이웃 나라와 전력망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고립 계통이다. 전기가 남아도 보낼 곳이 없고, 부족해도 빌려올 곳이 없으며, 모든 문제를 자기 계통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시설은 제주와 호남에 몰려 있는데, 이 전기를 수도권까지 나를 송전선을 짓는 데는 5~15년이 걸린다. 반면 태양광 발전소는 수년이면 완공된다. 서울의 전력 자급률이 약 10%에 불과한 현실에서, 발전과 소비 사이의 지리적 간극을 메울 기반 없이 보급 속도만 앞서 나갈수록, 고립 계통인 한국의 위험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더 크게 증폭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자립의 진짜 의미는 발전소 설치 숫자가 아니라, 외부 충격에도 끄떡없이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계통의 회복력에 있다. 재생에너지 가속화라는 올바른 정책 방향이 관성, 출력제한, 송전망이라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호르무즈 봉쇄 같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에너지 안보가 완성된다. 숫자로 쌓은 실적이 아닌, 전기가 실제로 안정되게 흐르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위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짜 과제이며, 발전소를 짓는 속도만큼 전력망을 튼튼히 하는 일에도 같은 무게의 투자와 정책적 관심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한승문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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